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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월 01일 (일)

[한국사] 진개가 복속시켰다는 조선의 위치2

하이시윤 조회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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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소개된 조선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조선은 고조선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일개 지명이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를 보면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의 현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소는 주석하기를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조”를 보면 북평군에는 조선과 창신(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현의 주석에는 “서한. 동한을 거쳐 진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낙랑군에 속해있다가 그후 폐지되었다. 북위의 연화 원년(서기 432)에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키고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현의 위치는 진시대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시대까지의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를 확인해 내면 그곳이 서한.동한 이래의 조선현의 위치가 된다. 그런데 “晉書(진서) 지리지 평주낙랑군조”를 보면 진시대의 낙랑군은 한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방, 駟望(사망) 등 6개의 현이 있었는데 조선현은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고, 수성형은 秦(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조선현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수성현은 진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위치가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수성현의 위치는 이 지역이 된다. 수성현이 창려 갈석 지역이었다면 같은 군에 속해있었던 조선현은 이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한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 되어야 한다. 晉(진)시대의 낙랑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고 조선현도 그 위치가 서한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漢四郡(한사군)은 이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된다

“漢書(한서)”“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고전)” “賈捐傳(고연전)”에는 西漢(서한) 武帝(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으로써 郡(군)을 삼았다” 고 했는데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표현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北魏(북위) 延和(연화) 원년 (서기 432)에 移置(이치)된 조선현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隋書(수서)”“지리지 북평군조”에서 확인된다. 수시대의 북평군에는 노령현이 있었을 뿐인데 노령현에 대한 주석에는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하여 신창. 조선 두현을 統領(통령)하였는데 後齊(후제)(북제)시대에 이르러 조선현을 폐하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을 폐하게 됨에 따라 해양현을 비여현에 편입시켜 통령하게 되었다. 개황 6년(서기 586)에는 또 비여현을 폐하여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황 18년(서기 598)에는 노령현으로 개명 하였다. (중략) 長城(장성)이 있고 關官(관관)이 있고 臨渝宮(임유궁)이 있고 覆舟山(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고 玄水(현수), 盧水(노수), 溫水(온수), 閨水(규수), 龍鮮水(용선수), 巨梁水(거량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고 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현수,노수,용선수 등은 난하의 지류이며 비여현,장성,갈석 등이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바 있다. 따라서 북위시대에 이치된 조선현도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는데 후에 노령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된 북위 연화 원년(서기 432)에 있었던 조선현의 비여현 지역에로의 이치는 조선현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이루어졌던 것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 하류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문헌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것이 고조선 전체에 관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수 있다.

고조선지역 안에 국명과 동일한 지명이 존재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예가 참고로 제시 될수 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商王國(상왕국)의통 경우 국명과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邑(읍)이 존재했음이 甲骨文(갑골문)과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며, 西周王國(서주왕국)에서는 정치적 중심지를 周(주)라 불렀는데 도읍인 鎬京(호경)을 宗周(종주), 東京(동경)인 洛邑(낙읍)을 成周(성주)라고 불러 그 명칭이 국명과 동일했음은 주지된 사실이다.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여졌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으나 적어도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을 도읍지로 보기에는 너무 변방에 치우쳐 있고 고조선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노무 작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 노령현, 천안현, 무녕현, 창려현, 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보아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조선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아마도 고조선에서 국경지대에 방어용으로 축조했을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令疵塞(영자새)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큰 성이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변경의 고조선인들이 그곳에 비교적 많이 살았을 것인데, 중국인들의 눈에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ㅊㅊ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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