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료가 말하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기자조선의 도읍지 조선현은 낙랑군에 있고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요동군에 있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서 기자 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조선현은 낙랑군 소속으로, 위만 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험독현은 요동군 소속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조선현은 낙랑군 소속이고 험독현은 요동군 소속이다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의 첫 번째 현으로 조선현(朝鮮縣)을 실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낙랑군, 한 무제 원봉 3년에 열었다. 왕망(王莽)은 낙선(樂鮮)군 이라고 불렀는데,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
(주석:응소(應邵)는 조선현에서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라고 했다. 즉 기자조선의 도읍지라는 뜻이다)
낙랑군은 요동군과 지척인 발해만 일대에 있었다
『독사방여기요』 17권 북직(北直) 8의 영평부(永平府)조에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나온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청나라 고조우(顧祖禹)가 편찬한 중국 지리지로 『사기』부터 『요사(遼史)』, 『금사(金史)』,『원사(元史)』까지 21사의 지리지를 포괄해서 서술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성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 지금은 조선 경내에 있다 (『독사방여기요』권 17 영평부)”49)
즉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곧 낙랑군 조선현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평부는 현재의 하북성 노룡(盧龍)현 일대다. 노룡현은 발해만에 있는 난하강 지역이다
낙랑군과 요동군은 지척이었음을 말해준다
청나라 때의 영평부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옛 신창현으로서 한나라 때는 요동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평부의 북쪽 40리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건 낙랑군,요동군의 거리가 10km 안팍이란 뜻이다
이는 『후한서』군국지」및『진서』「지리지」도 이 군들이 서로 인접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산하의 영지성(令支城)에 대해서 영평부 동북쪽에 있다면서 “한나라 때는 영지현을 설치하고 요서군에 소속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요서군도 이 부근에 붙어 있었다는 뜻이다.
한사군은 발해만 일대에 속해있는 작은 지역일 뿐이다
즉 한나라는 고조선 서쪽에 있던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일대에 낙랑·현도·임둔·진번군을 설치했지만 상징적 승리일 뿐 영토 확장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임둔·진번군을 곧 철폐한 것으로도 이는 명확해진다
관변사학이 낙랑군을 평양일대라고 비정한 근거가 빈약하다
한국 사학계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土城洞) 토성으로 보고 있다. 먼저 동북아역사재단은 2009년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게재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王險城)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浿水)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列水)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
여기서 핵심 주장은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王險城)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것이다.
왕험성은 ‘대동강 북안’, 낙랑군 조선현은 ‘대동강 남안’이라는 거다
왜 왕험성과 낙랑군 조선현을 분리헀을까?
『사기』「조선 열전」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로 새외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 왕험성에 도읍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이른바 실증주의에 의한 문헌비판을 하다 보니 왕험성이 패수 건너편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하다보니 대동강 북쪽에 있는 평양을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으로 비정하기 곤란했다. 그래서 대동강 너머에 있는 남쪽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를 찾기 시작했고 토성동에서 토성 흔적과 와당과 벽돌 몇 편이 나오자조선현 치소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는 아무런 문헌적 근거가 없다보니 고고학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특정할만한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사료가 뒷받침되고 있을까?
하지만 토성동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기 때문에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수(防守)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등 치소로서의 위치로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총독부의방침에 따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을 ‘낙랑군치’, 즉 ‘낙랑군 조선현’ 자리로결정했다. 대동강을 패수로 보고 『사기』 「조선열전」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로 새외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 왕험성에 도읍했다’는 구절에 꿰어 맞춘 위치비정이었다
다시말하면 평양이 위만조선의 도읍지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나 무조건 평양이라고 우겼고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이나마 평양부근으로 상정하기 위해 대동강 남안을 조선현으로 무리하게 정한것이다.
그것조차도 문헌도 없이 근거도 없는 몇쪼가리의 고고학적 근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