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발해 영토의 기록
구당서 북적렬전 발해말갈
동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다
東北至黑水靺鞨,地方二千里
신당서 북적렬전 발해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戶口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서계書契를 잘 안다. 부여·옥저·변한·조선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地方五千里,戶十余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무예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두려워해 그를 섬겼다
子武藝立,斥大土宇,東北諸夷畏臣之
인수仁秀는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部를 토벌하여 국토를 크게 개척한 공이 있다
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
신당서 북적렬전 말갈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되어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後渤海盛,靺鞨皆役屬之,不復與王會矣
1. 2. 발해 영토의 통설
앞서 구당서에는 대조영 임금의 치세를 이르러 方2000리라 하며 흑수말갈에 닿는다 하였다. 즉, 발해의 영토는 초기에 이미 흑수말갈의 분포 지역에 이르렀다. 그런데 위 지도는 최전성기인 선왕 대의 영토가 흑수말갈에 닿았다고 하고 그나마도 흑수말갈을 끝까지 강역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발해의 영토를 심하게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사서 기록으로 보자면 결국 위 지도에 선왕 이후의 영토라고 소개된 국경선이 고황제 대조영 대의 국경선이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존중해서 그 붉은색 경계선이 맞다고 보고 둘레를 보겠다.
1. 3. 통설 지도로 본 국경의 둘레와 함정
저 당시(대조영 황제)의 발해 영토가 구당서에서는 방 2000리고 신당서에서는 방 5000리로 나온다. 당나라에서 1리는 530미터였다. 2000을 곱하면 1060키로가 된다. 5000리는 곧 2650키로다.
여기서 따질 점은 위 지도에 나온 둘레 2557키로는 국경선의 실태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과 못, 늪지대 등 각양의 지형을 통과하며 측정한 거리는 직선 구간과 부드러운 곡선 구간으로 이루어진 위 경계선의 측정값보다 훨씬 길지 않을 수가 없다. 들쭉날쭉한 해안선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위 지도는 학자들의 사서를 무시한 엉터리 비정으로 쪼그라든 결과이다. 그러니 확고한 결론이 나온다.
方은 둘레를 의미할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신구당서 해석본에서 方을 사방이라 해석함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참고
https://blog.daum.net/sheshow/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