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몽골의 한 부족 솔롱고스와 고려
몽골인은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 : Солонгос) 또는 고올리, 가올리 올스(Гаули улс), 코리(Кори), 솔롱고(Солонго), 솔호(Солхо) 등으로 부른다.122) 솔롱고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1240년 전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비사(蒙兀秘史)』로 솔롱고스라는 단어 옆에 한자로 고려(高麗)라고 표기하고 있다.123)
칭기스칸은 메르키드족(Merkid)을 정벌하여 미녀 쿨란(Khulan, 1164∼1215 : 메르키드족)을 얻었는데, 이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라고 불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124) 쿨란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 등의 사서에는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의 솔롱고스가 고려(高麗) 또는 발해(渤海) 또는 신라(新羅) 가운데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메르키드를 솔롱고스와 동일하게 인식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몽골인이 몽골의 한 부족인 메르키드가 남하하여 고구려(부여)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204년경 메르키드는 셀렝게(Selenge)강 일대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미녀 쿨란 공주가 메르키드이니까 몽골인들은 아마도 고려 여인들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로 생각한 듯도 하다.125) 몽골인들은 메르키드족의 일부가 동남으로 진출하여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Hulunbuir) 몽골 초원에 이르러 일부 국가를 구성하기도 하고 한반도 쪽으로 이동해갔다고 보고 있다. 그 유적으로 알려진 것이 부이르(Buir) 호반의 유명한 고올리칸(弓王: Goolikhan) 석상이다.
비공식적이지만 공인된 사실로, 칭기스칸의 생부(生父)는 예수게이(Yesüei, ?~1171)
가 아니라 메르키드(솔롱고스)족인 예케 칠레두(Chiledu)이다. 예수게이는 칠레두의 아내였던 임신한 후엘룬(Hoelun)을 납치하였고, 이 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테무친(鐵木眞 :칭기스칸)이다. 그렇다면 칭기스칸 역시 솔롱고스(메르키드)의 피를 이은 사람이다. 따라서 원나라 황실은 솔롱고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마 이것도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는 중요한 원인이었을 수가 있다.
『원사(元史)』에 “박사인보카(박불화)는 솔롱고스 사람.”이라고 되어있다.126) 즉 고려 대신에 솔롱고스(肅良合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원사』에 원 혜종(순제)이 기황후에게 책과 보물을 주면서 “너 솔랑카(肅良合 : 고려를 의미)씨는 명족(名族)에서 독실하게 태어나 이 나라로 와서 짐을 몸소 섬겼다.”라고 하였다.127)
소미야바타르 등에 따르면, 13세기 이전에 몽골에서는 ‘솔롱고스’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128) 또 몽골 학자 바트술해(Batsuuri)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으며 400년 몽골의 니런(Nirun) 지방과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고구려(또는 부여)를 지칭하는 '솔롱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되었다고 한다.129)
아요다인 오치르(Aio`dync Oehir)는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하는데 17세기 말까지 메르키드(Merekid), 발가(Barga), 부리야트(Buryat) 등의 몽골 일부 부족을 역시 솔롱고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그들의 종족의 일부가 한반도까지 남하하여 까우리(Khori : 코리)의 나라인 코리어(Korea)를 건설했다고 믿고 있다.
현대 몽골의 대학 교재나 교양서적에서는 동쪽에 접하는 나라로서 ‘솔롱고스’를 기록하고 있는데 원나라 시대를 기록할 때에는 ‘솔롱고스’와 ‘고올리(高麗 : Korea)’라 섞어 쓰고 있다. 이 때 솔롱고스나 고올리는 모두 한국을 뜻하는데 시기적으로는 고조선 - 부여․고구려 - 통일신라 - 고려 등을 포괄하고 있다.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