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1851-1894)은 잘 알려진 대로 조선 말 개화파의 한사람으로 갑신정변(1884)을 주도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10년을 지내다가 민비 일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로 건너갔다가 그 곳에서 살해된 사람으로 실패한 개화인물로 평가된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개화사상가로서, 국가나 민족도 개별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줄 알면 살아 남고 그렇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 도태되어 힘있는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회진화론(Social Darnism)과, 일본이 아시아를 넘어 구미 국가와 대등하게 되자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한 인물로서 일본 1만엔 지폐에 그의 모습이 실려 있을 정도로 성공한 개화사상가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그는 시사신보를 창간하고 게이오 대학의 전신인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하였으며 저서로는 <학문의 권유><문명론의 대강>이 있다. 그가 임오군란(1882) 후 수신사로 일본에 간 박영효에게 조선에서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권유하였고 박영효가 이를 받아들여 귀국한 뒤 최초의 신문인 관보 한성순보(1883)를 발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개화파로서 김옥균은 실패하였고 후쿠자와는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능력의 차이가 있어서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민중의 무지와 편견, 조선 민족성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강하게 표출이 되어 김옥균 등의 개화운동은 실패를 했다고 본다.
후쿠자와가 조선에서 태어나 개화운동을 했더라면 그도 역시 김옥균처럼 실패했을 것이라고 본다.
갑신정변때 개화파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서재필도 그의 회고록에서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개화파들의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배일을 부르짖으며 반대하는 민중의 무지와 몰각때문"이라고 했다.
자세한 실패 원인은 뒤로 미루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인물들의 출신 환경과 그들의 가족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먼저 살펴보자.
갑신정변 주동인물들은 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상의 이익만을 누리려고 했어도 그들은 상류의 생활을 하며 특권층으로 살만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특권을 버리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그들에게 돌을 던지며 정변을 방해한 것이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인 김옥균은 그의 양부 김병기가 옥천군수와 강릉부사를 지낸 사람이다.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천안 감옥에서 10년 동안 모진 옥고를 겪다가 교수형을 당했고, 어머니 송씨와 김옥균의 부인,누님은 음독xx했으며, 동생 김각균은 대구에서 체포되어 옥사했다고 한다.
개화파의 일원인 박영효는 고종의 직전 임금인 철종의 사위다. 본래 철종에게는 슬하에 5남6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이 죽고 다만 제4녀인 영혜옹주만이 살아 남았는데 영혜옹주의 남편이 박영효다. 다시 말하면 철종의 부마인 것이다.
그런데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음독xx하였고, 뱍영효의 동생 박영교는 갑진정변 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참살 당했다.
우정국 총판으로서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을 지냈으나 갑신정변 후 음독 xx했고, 그의 처자와 형 홍만식도 음독 xx하고 홍영식 자신은 정변 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주륙당했다.
두 사람 다 개화파의 일원인 서광범과 서재필은 삼촌과 조카사이인데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언은 동복군수를 지낸 사람이고 그의 선대 서종제의 딸이 영조대왕비가 된 정성왕후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의 부모는 도륙당하고, 서재필의 아내는 음독xx하였으며 서재필의 두 살난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와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옳았는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의 국내 상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대주의란 정확하게는 사대교린주의(事大交 主義)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국시로 삼은 사대교린주의는 쉽게 말해서 중국은 땅덩어리도 크고 인구도 많고 하여 조선이 중국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마음편하게 중국을 임금의 나라로 대접하며 살고, 일본은 땅덩어리나 인구면에서 조선과 비슷하니 친구처럼 지내자는 뜻이다.
조선 백성들이 이런 사상에 오랫동안 젖어 살다보니 임금의 나라인 중국의 사상이나 제도, 문물, 중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등에 대하여는 그것 자체를 감히 거스릴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을 이겨야 할 경쟁 대상으로 보거나, 중국에 대하여 반론이나 비난을 할 생각을 못하고 중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만으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신 일본은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일본에 대하여는 비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본과는 싸워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일본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거나, 중국으로부터 경쟁자인 일본보다 더 많은 총애를 받으려는 생각에서 맹목적인 반일을 주장하는 풍조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
그런 풍조가 일반화 되다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치자거나 중국을 몰아내자고 하는 사람은 임금의 나라를 거스리는 반역자로 보거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한 짓을 하는 또라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반면, 일본을 욕하거나 배일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애국자 취급을 하거나 스스로 애국자인체 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혼자 실컷 입에 개거품을 내며 한참 일본 욕을 하고 나서는 '나는 이런 애국자이니 나를 한 번 쳐다봐 달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대 교린주의 사대 교린주의 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반일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성이 아니라 군중심리로 그런 주장을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일본하고 축구할 때 어떻게든지 일본은 이겨야 한다고 하여 일본을 이겨놓고도 다음에 일본한테 진 팀하고 경기할 때는 우리보다 한 수 위이니 우리가 그 팀한테서 한 수 배워야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아무런 생각없이 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을 이겼고 우리와 대전할 상대는 일본한테 진 팀이니까 우리가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옛날부터 우리가 일본을 이기겠다는 각오만큼 중국을 이기겠다는 각오로 살아 왔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히 일본은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이다. 즉, 일본은 반일의 대상이 아니라 극일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친일파다 매국노다 하며 비난을 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하여 욕만 하면 자연히 일본을 이길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말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우매한 백성들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일본만이 아니고 중국 소련 미국 그 밖의 우리의 생존에 간섭하거나 우리의 발전을 방해하는 어떤 나라라도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임오군란(1882년)의 직접적인 원인은 별기군과 구식군대의 차별대우와 당시 민씨 정권의 부패로 인한 녹봉의 체불이지만 일본 교관을 죽이는 일로 확대된 것은 위에서 말한 일본만을 경쟁상대로 삼는 사대교린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을 해야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해야 애국자인 것 처럼 생각하는 풍조 때문인 것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까지는 일본의 전투병이 조선에 파견된 일이 없었다. 단지 신식군대를 훈련시키는 교관만 파견된 상태였다. 일본 교관을 살해할 만큼 일본 군인들이 조선에 대하여 비리를 저지른 일이 없다. 그런데 반일을 주장하면 애국자라는 군중심리 때문에 반일을 주장하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이 일본 교관을 살해한 것이다.
임오군란 후에 일본과 청나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 온다. 임오군란을 일으켰던 구식군대나 조선백성들이 그 전에 청나라에 대해서 해꼬지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보복을 하자면 자기들 교관이 살해당한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해야하는데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청나라가 조선백성들을 상대로 점령군 행세를 하며 살육행위를 한 것이다.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간 것뿐만이 아니라, 청나라 군사들이 백성들 집에 들어가 재물을 빼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매일 계속되었다.
그 중 피해가 심한 곳은 왕십리와 이태원인데 임오군란을 일으켰던 구식군인들의 주된 거주지가 이 곳이어서 청나라 군사들이 이곳에 들어가 200여명의 백성들을 잡아가고 10여명의 백성들을 죽였다. 이런 행패를 보면서도 청나라에게 대항 한 번 못하는 것이 조선의 백성들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 당당하게 대들던 백성들이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꼼짝도 못하는 것, 이런 사대교린주의에 빠진 백성들이 우매한 조선 백성들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동학혁명 때도 나타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박영효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문국에서 1883년에 발행한 한성순보다. 이 한성순보가 창간 후 6개월도 안 되어 청나라의 압력으로 폐간되는데 그 사유는 이렇다.
광교 근처에서 약방을 경영하는 최택영이라는 사람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밤에 이 집에 침입해 이 딸을 겁탈하려다가 이를 제지하는 최택영 부부를 살해하고 딸까지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개화파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한성순보가 이를 보도하자 청나라에서 한성순보를 폐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임오군란으로 충주로 피난 갔던 민비를 구해준 것이 청나라이고 민비와 앙숙관계에 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간 것도 청나라이니 민비 정권으로서는 청나라의 압력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그저 국정의 대소사를 조선주재 청나라 영사 진수당과 청나라의 애숭이 장수 원세개를 원대인이라 칭하며 그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청나라의 압력에 따라 한성순보도 폐간한 것이다.
개화파들이 일본의 힘을 빌려 갑신정변을 일으킨 방법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더 알아보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집권 세력인 민비를 비롯한 사대파들은 국정의 대소사를 청나라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고 있었기에 자주적인 경향을 띈 개화파들과 사사건건 마찰이 있었다.
한성순보 폐간뿐 아니라, 근대식 군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사관학교 설치를 주장하는 개화파들의 주장을 청나라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심지어 사대파의 거두 민영익은 청나라보다 더 강한 러시아 보호국이 되자는 주장을 하여 김옥균과 대립하고 있었고, 대원군의 청나라 납치문제에 대하여도 개화파는 반대하여 사대당과 대립하고 있었으며,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김옥균의 차관교섭 주장에 대하여 청나라에서 파견하여 사대당의 입장을 대변하던 묄렌돌프는 당오전, 당십전의 발행을 주장하여 개화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3,000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선호텔 자리라면 경복궁에서 바로 코앞에 있는 곳이다. 조선의 사대관리들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청나라의 말이라면 거절을 못하고 반개화, 반개혁적인 언동을 하고 있었고 개화파들은 그 반대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개화파들이 외세인 일본의 힘을 빌려서 개혁하려 한 것은 칭찬할 것이 못된다.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외세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화파들만의 힘으로 혁명을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겠는가? 개화파들만의 힘으로 조선에 주둔하는 3,000명의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면 조선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개화파에 합세하여 청나라 군사들과 대항하여 싸워 줄 수 있었을 것인가? 내가 보기엔 앞에서 든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보고도 상국(上國)의 군사라고 하여 말 한마디 못하는 세태로 보아 그것도 불가능했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당시는 2차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의 내용을 트집잡아 이퇴계의 후손인 이만손이 만인소를 올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유림들이 개화를 반대하며 들고 일어 나던 때이다.
당시 개화에 반대한 것은 유림들이 상소를 올렸으니 형식상은 유림들만 개화에 반대한 것 같지만 당시 분위기로 봐서 극히 일부의 선각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백성들이 개화에 반대했다고보는 것이 옳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개화파들이 대화로써 개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사대당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인가? 당시 민비와 대원군과의 관계, 청나라와 일본과의 관계, 오직 조선이 소중화(小中華)임을 자랑으로 삼고 일본이나 서양이나 똑같은 오랑캐(倭夷洋夷同夷論)라고 생각하고 개화에 반대하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인식을 종합하여 판단하건데 그것도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개화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에 의지하여 무력으로 혁명하는 것 외에는 없을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자면 이 방법이 칭찬할 것은 못되지만 당시 상황에서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대당이 끌어 들여온 외국 군대가 없는데도 개화파들이 일본군이라는 외세를 이용하여 혁명하려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개화파의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개화파가 잘못한 짓이다.
그런데 사대당이 청나라 군사를 끌어 들여왔으니까 잘못은 먼저 사대당에게 있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잘 못 끼운 첫 단추의 근원을 찾아 소급한다면 그 책임은 사대교린주의를 국시로 취하여 외세를 자연스럽게 끌어 들여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이성계까지 거슬러 올라 가게 되지만, 그렇게 되면 논의가 산만해지므로 더 이상의 소급은 않겠다( 어떤 사람은 갑신정변도 개화파가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하여 일으킨 지배계급사이의 권력투쟁이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역사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사이의 투쟁으로만 보는 견해이고 과장된 비약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왜 갑신정변은 실패하여 김옥균은 실패한 개화사상가가 되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성공한 개화사상가가 되었을까?
이 말은 왜 우리 나라는 개화를 못하고 제국주의의 밥이 되었고, 왜 일본은 개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의 주인공 노릇을 하였을까 라는 질문과도 같은 말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그 원인을 조선민중의 무지와 편견, 우리 민족성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강하게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것에 대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의 개화파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일본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사는 3,000명인데 개화파의 부탁에 의하여 임금이 거처하는 창덕궁을 수비하는 일본군은 200명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일본군은 일당백의 실력을 가졌기에 오합지졸인 청나라 군사 몇 천명정도는 문제도 아니니 혁명을 실행하라고 호언장담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도 청나라 군사가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포위해 오자 꼬리를 내리고 호위하던 창덕궁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간사한 일본이 자신의 나라 일도 아닌데 목숨걸고 청나라 군사와 싸워 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화파 자체의 군사들이라야 호위 군사 약간 명이니 이 군사를 가지고 청나라 군사와 싸울 형편도 못되는 것이었다.
이 때 조선의 백성들이 깨어 있기만 했더라면 개화파를 도와 청군과 대항했더라면 일본군도 이에 사기를 얻어 청군과 대항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은 성공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화파를 돕기는커녕 개화파들이 청군에 밀려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다.
청나라 군사들의 온갖 행패에는 끽소리 하나 못하던 조선의 백성들이 조선의 개화를 위해 자신들이 타고난 신분상의 특권까지도 버리고 목숨 걸고 일하는데 이 들에게 돌을 던진 것이다.
개화파와 일본군에게 돌을 던진 조선의 백성들도 제 딴에는 애국한다는 마음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애국심이라는 것이 청산해야 할 사대교린주의의 바탕 위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잘못된 것이다. 타도해야 할 대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청국도 포함되는데 일본을 타도하자고 주장하면 애국자이고 청나라를 타도하자고 하면 반역자, 또라이라는 생각이 여기서도 개화파와 일본군에게 돌을 던지는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
혹시 일본에 의지하여 개화하려는 것이 위험한 짓 아니냐고 할지모르지만 당시 개화, 개혁이 절대 절명의 명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도 들어가는데 모험을 마다할 입장이 못된다고 본다. 더구나 당시에 사대당이 이미 청나라를 끌어들인 판이라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우리의 목표는 반일이 아니라 극일인 것이다. 극일을 하려면 일본의 장단점과 우리의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장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매국노다 친일파다 몰아치며 얘기 자체를 금기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일본을 이기겠다는 의지도 전략도 없이 그저 일본에 대하여 욕을 하면 그것이 애국이고 자연히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사고 방식이 단순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우리 민족성의 단점의 하나로 지적한 '이성적 판단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나는 판단한다(자세한 것은 민족성 개조단 홈페이지 '시론' 중 '이것이다-민족성의 단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조선 백성들의 무지몽매와 이성적 판단력의 부족, 사대교린주의라는 우리 민족의 단점이 강하게 표출이 되어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김옥균은 실패한 개화사상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건데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 소련 중국 등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주는 모든 세력이고 우리는 이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02. 5. 12. 부국 강국 통일을 위한 민족성 개조단. 서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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