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16국 시대에 여러 유목민들이 중국을 침략하고 북중국에 많은 나라들을 세우죠
이시절 선비족이 몇백년에 걸쳐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과정에서 한화정책을 세워 사실상 수나라 시대가면 완전히 한족 나라 처럼 되버리는데 그 과정에서 선비족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나 보군요
하지만 북위 내부에서는 선비족의 풍습을 지키려는 세력과 선비족의 풍습을 버리고 한족화를 진행하려는 세력과의 다툼이 일어났다. 한족화를 진행시키려는 세력의 중심은 주로 한족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한족화가 진행되면 자신들의 입장이 유리해지는 동시에 문화로 이민족을 이기는 결과를 가져와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굴욕을 씻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한족파의 대표는 한인인 최호였다. 최호는 외래 종교였던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 교단의 교조 구겸지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폐불(불교 탄압, 삼무일종의 폐불의 제일 첫 번째)을 주장하고 그 일을 실행시켰다. 또한 최호는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강제적인 한족화는 선비족의 반감을 사서 450년에 주살되었다. 그 후 북위에서 태무제가 암살당해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문명황후였다.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의 적모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후에 헌문제에게 장남 굉(宏; 후에 효문제)이 태어나자 잠시 물러났으나 효문제의 생모를 죽인 일로 헌문제와 대립해 헌문제를 폐립하고 효문제를 옹립했다. 북위에서는 외척의 횡포를 배제하기 위해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 통례였다. 문명태황태후는 계속 수렴청정을 하면서 봉록제, 삼장제, 균전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와 한족화를 추진했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었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 후 대대적인 한족화 정책을 추진했다. 황실의 성씨을 원씨로 고치고, 구품관인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주둔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