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도 한번씩 심심하면 나오는 무개념, 무식한 조족 가이드들이
조선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 크기 어쩌고 드립부터(경복궁 면적
만 해도 자금성의 절반 이상) 가끔보면 꾸준히 나오는 비교가 자금
성(紫禁城)의 성(城)과 경복궁(景福宮)의 궁(宮)의 개념 자체를 이해를
못하고 단순 비교하는 부분이 있어 이참에 명확한 개념 정립을 위해
서 한 글 올립니다.
성곽(城郭)이란 기본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점차 정주문명화 하든
이들이 외부의 동물이나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왕국시대 완연한
성곽에 두르던 해자(신석기 시대 만주 요하일대의 발해문명에는
적봉일대의 홍산문화뿐 아니라 동쪽으로 앞서 대릉하 일대의 조양
북쪽에 흥룡와 문화(기원전 6000년~5200년)가 나오는데 짱개들은
무슨 중화제일촌 어쩌고 드립치지만 전혀 이질적 고조선 선대 문화
권으로 빗살무늬토기부터 정교한 옥기 심지어 이미 이때 해자까지
두르고 온돌 아궁이에 신석기 시대 상당한 밀집 취락의 정교한 도시
형의 발달한 촌락이 이미 나오고 있는. 이 요하 일대 신석기 문화와
고조선이 어떤 식의 고리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나중에 시간날때 구
체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군요)가 형성되기 전의 일종의 원시
적 도랑부터 흙축, 목책성 외 점차 문명수준이 올라가면서 정교화되
는 가운데 대규모의 인력 동원이 가능해지는 국가 체계가 이루어지
면서 토성,자연석을 이용한 석성 및 벽돌형의 전축(磚築)등 사용되는
종류에 따라 크게 나뉘고 성의 성격에 따라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 저 위의 서북한일대의 고구려의 장안성(일명
평양성)의 경우는 전체 길이는 약 23㎞에 성안의 넓이는
자그만치 1,185만㎡. 그중 내성은 130만㎡, 중성은 300만㎡, 외성은
730만㎡에 저기 모란봉 어쩌고 하는 글자가 보이는 곳이 북성으로
25만㎡으로 좀더 복잡한 체계를 갖춘 당시 도시문명 수준이나 지금
에 봐서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크기입니다.(이건 아래 언급하겠지
만 후대 중세 프랑스 중심 도시인 파리의 성곽 크기만 비교해봐도
금방 확인 가능. 그리고 고구려는 이런 장안성 외에도 황해도의
한성(10.5㎞으로 남평양으로 부르는) 그리고 국내성 및 요동일대 16
㎞의 대형 오골성(오늘날 북평양으로도 거론)등의 다중 수도 체재와
대도시문명을 구축 )
다시 성곽(城郭)이라는 사전적 단어로 들어가서 이때 성이란 다름
아닌 국가의 통치자가 생활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궁(宮)을 보호하고
있는 내성을 의미하고 곽이란 다름 아닌 인근 백성까지 거주하고
생활할 수 있는 외성을 지칭하는 말로 내,외성을 함축하고 있는
뜻입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주축인 된 부르조아(Bourgeois)의
부르(Bourg)라는 말이 중세시절 성안에 있는 사람으로 이런 부유한
상공인들을 부르면서 나온 말로 한마디로 동,서양간에도 이런 기본
외성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고대 도시민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위의 설명을 토대로 자금성과 경복궁이 뭐가 다른지 이제는
이해하기 쉬울 듯 하군요.
한마디로 자금성은 내성(城)개념 안에(내성 안에서도 별도의 또다른
임금이 생활하는 이중 구조도 존재) 건청궁(乾清宫), 곤녕궁(坤寧宮),
어화원, 동륙궁(东六宫), 서륙궁(西六宫),자녕궁 등이 다
들어가 있는 구조입니다.
그럼 궁궐(宮闕)이란?
우선 궁은 임금과 그들 가족 및 보필하는 이들이 거주
하는 건축물에 궐이란 이런 대궐문이 합성화된 공간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이런 내성안에 궁궐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공간이란 의미>
그런데 조선의 한양도성(18.6Km) 은 이런 고구려나 고려시대같이
따로 내,외성을 구분하지 않고 외성만 두른 형식입니다. 경복궁의 담
장이 넓은 의미로는 궁성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자금성처럼 여러 궁
을 거느리면서 해자와 방어에 용이하게 성곽형태를 두른 내성으로
보호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죠.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단순히 자금성
과 경복궁의 궁의 차이를 인지못하고 단순 비교하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만 정확히 비교할려면
자금성과 한양도성 내에 내성의 필수 공간인 조선 5궁을 합쳐서 함
께 비교해야 그래서 합당한 것입니다.(다음 부터는 굳이 자금성과 비
교할려면 조선 5궁을 함께 비교)
조선 내성(內城)(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창경궁+경운궁)
43만㎡+ 43만㎡+ 23만㎡ +21만㎡+6만㎡ (아래 단위는 생략)
=136만㎡
자금성(내성(內城)) 면적(건청궁+곤녕궁+어화원+ 동륙궁+서륙궁+자녕궁)
=72만㎡
조선 내성(內城: 조선5궁)>>자금성(내성(內城)
그리고 이건 서북한 평양 일대의 성곽들인데 앞서 장안성은 왼쪽의
한성 평양이고 그 동북쪽으로 보면 별도로 안학궁과 인접한 셋트형
의 도시형 대성산성등 여러 성곽들이 확인 가능할겁니다.
고구려는 이런 중대형 거대한 성곽등 확인되고 있는게 100여개 이상으로
특히나 서토의 평지 장방형의 토성 위주의 성곽과는 달리 지
형을 이용한 유선형의 굴곡 있는 성곽형태에 특히나 산성이 도시형
규모로 매우 발달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면 수도의 경우는
평시에는 평지성에 유사시를 대비해서 도시형 산성을 셋트형으로
구축하고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 한양도성 외에도 남,북한 거대 도시
형 산성을 축조해서 셋트형으로 두고 있다는 점도 우리만의 독특한
성곽문화이자 유구한 고대 도시문명의 전통입니다. 보통 짱국 학자
도 그래서 만주일대의 중대형 산성들은 삼국시대쪽이면 기본 거의
고구려의 성곽으로 인식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고 그래서 이전에
번게에서도 고조선 관련 잠시 이야기를 했지만 요서일대
오한기 지역의 기원전 20세기 경의 하가점 하층문화권에서 나오는
성자산산성에 그래서 자연스러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단
말이죠. 특히나 고구려,백제의 치(雉)의 원형으로 보이는 외성에 반
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발견되었는데 이 치라는
게 뭔가 하면 우리 성곽 문화에서만 독특하게 보이는 형태 중 하나
로 외적이 공성전으로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 올때 외벽에 튀어 나
온 성곽구조물을 이용해서 정면뿐 아니라 양 사이드에서도 공격을
쉽고 원활하게 하는 구조입니다. 이외에도 치는 이런 기능적 면뿐
아니라 산성의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다 보니 성곽 자체가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지지 기반의 건축 공학적 역할도 합니다.(고구려는 가파른
산지 지형에서도 거의 8~10여미터에 이르는 높이의 석축에 도시형
산성을 축조) 이 성자산 산성은 이외에도 우리 성곽의 독특한 옹성
(성문 내부에 이중 성벽을 둘러 적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고 공략하
기 쉽게 한) 형태의 별도의 치와 깊은
해자까지 두른 형태까지 발견되는데 우리의 전통적 산성 축조술과
원형의 특징들이 고스란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는 이런 치라는게 왜 우리쪽에서만 유독
독특하게 발전했을까 생각해보니 이런 산성 성곽이 오래 전부터
발전하고 구축하면서 이런 자연석을 이용해서 어떤 접착물도
없이 석축을 쌓는 과정에서 가파른 지형에 우선 성벽축을 지대하기
위한 현실적 고안형식으로 발전하다보니 점차 이후 전쟁이 빈번해
지는 철기시대로 가면서 더욱 정교해지고 공성전에서 적의 방비를
위한 더욱 원활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보군요.
기원전 20세기 하가점 하층 문화의 삼좌점 고구려 치의 원형 석성으
이건 고려시대 4경중 수도인 개경으로 현종(992년 ~ 1031)
때가 되면 외성 밖으로까지 도시의 중요 건축물 중 하나인 사찰들이
뻗어 나가 있는 걸 알 수 있군요.(남북국시대, 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라서 이런 사찰은 도시 중심가의 중요 건축물로 자리잡은.
이를 보면 도시가 외곽으로 계속해서 팽창을 알 수 있는.)
이건 13세기 중세 유럽을 대표하던 프랑스 파리도시입니다.
파리의 성곽 내부 면적은 2.4㎢에 실제 시가지가 형성된 면적은 약 1.5㎢
정도에 불과(우리나라 중세 고려는 남북국시대 세계 4대
국제적 대도시라는 과장없는 100만의 거대 서라벌을 동경으로 흡수
하고 수도인 개경이 50만의 거대 도시를 주축으로 서울 남경과 더불어
서경(평양)의 4경 대도시문명과 중소 도시를 거느린 시기였는데 이
서경만해도 도시시가지 면적이 1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