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당문집] 자체가, 본인이 직접 쓴게 아니라, 증손자였나?
하여튼, 후손이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아
자기 할아버지인 김충선을 기리기 위해 출판된 책인지라.
당사자가 죽고, 몇십년 뒤에 간행된 것으로
어느 면에선, 자기 조상을 아름답게 포장? 한 부분이
좀 들어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아무튼,
몇가지 알수 있는것은,
1) 조선에 올때 20-25 전후로 젊었음/ 일본에 형제가 있었다는 것.
2) 비교적 빨리 투항한걸보면, 일본에서부터 정벌에 회의적인 감정이 있었다는 점.
3) 화포, 검술, 병사들 훈련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
4) 그를 만나본 조선관리들은, 그의 인품과 재능이 출중하다 평가함.
5) 선조에게 이름을 하사받은 유일무일한 항왜
6) 왜란후 조선에 정착, 조선여자와 결혼해 가족을 이룸
7) 이괄의 난, 병자호란에도 활약
- 이 정도가 팩트고
그외, 모하당문집에서 약간 포장?되었다고 볼수 있는 점은
1) 가토의 선본장
2) 같이 투항한 부하가 300명이 넘는다는 점
김충선이 가토의 선본장이라 모화당문집에 적여있으나,
실제로는 가토의 군대에 소속된게 확실히 맞는지도 알수 없으며,
따라서 가토의 선봉장 운운은 알수 없습니다.
워낙, 왜란때 가토의 악명이 자자했는지라, 조선인들에게 잘 알려진 일본장수였고
그래서, 후대에 우리 할아버지(김충선이) 가토의 군대에 있었다느니, 그 군대의 선봉장으로 섰느니-
할아버지의 명성을 좀 더 높이기 위해 썼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대규모인 300여명을 투항시키려면,
그들을 어느세월에 같이 항복하자고 설득했는지도? "
-300여명 혹은 3000여명을 투항시켰는지 아닌지의 사실여부는 제껴놓고 가능과 불가능을 말한다면.. 불가능한 부분은 아닌듯 합니다. 일본은 봉건사회였고, 선봉장으로써 300, 혹은 3000명을 거느렸다면 그건 가토가 준 병력이 아니라 자신(혹은 자신의 가문)의 영지에서 데리고 온, 또는 자신이나 가문의 재화로 고용한 용병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사고로 당시의 부대를 생각하시면 안될 듯 하네요...
일본 소설 대망을 읽어본 입장에서는
가문 전체로 투항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희생이 일본식 주군과 가신의 관계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이미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 형태로 다른 가문에 배속되는 형태로 있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런 일을 한두번 격는 것이 아니라서 자기 이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얻기까지 수차례 인질아닌 인질 (형태는 양자)로 이리 저리 세력가의 소속으로 끌려다닙니다.(다른 세력가로 끌려갈때마다 이름이 바뀜... 어릴 때 아명을 포함하여 10번 정도 이름이 바뀐 듯) 그 상태에서 세력가를 위하여 가신과 함께 전쟁에도 참여하고요.
가토가 스무살이 좀 넘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선봉장을 맡길수 있을까?... 라고 하셨는데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확히 김충선의 내력을 알 수 없기에 일반적인 부분만 언급해야 할 부분인거 같은데.. 여튼, 가토의 병력 중 선봉장이라면 대략 2~3000명 정도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현대로 보면 연대급이죠. 전략적 능력보다는 전술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이고 좀 젊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될건 아닙니다. 어차피 경험많은 가신들이 보좌 했을 테니까요. 당시 일본은 봉건제 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제가 김충선이 가토의 선봉장이라고 주장하는건 아닙니다. 젊다는 문제에만 이의를 제기한겁니다.)
김충선은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철포대(일본에서 조총 부대를 일컫던 이름)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일본 측 사야카 연구가들은 일본 센고쿠 시대때 와카야마 현의 사이카(雑賀)라 불린 철포 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가 사야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와카야마 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 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일본 소설가 고사카 지로도 그런 사람들의 한 명이다.[6]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조선으로 출정했고, 출정 후 즉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나고야 성(현 사가 현 가라쓰 시)까지 100명을 이끌고 갔는데, 스즈키 혼자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측의 기록에서 사이카슈(雑賀衆)에 소속된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시유키의 이름과 김충선의 자인 선지(善之)인데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고 하여, 그가 김충선이라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 사이난가쿠인 대학의 마루야마 교수는 사야카가 스즈키 마고이치가 아니라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마고이치는 반히데요시 세력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가토의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토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및 장수 명단에 사야카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는 있으며, 하라다 역시 출병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면서 그가 사야카라고 주장한다. 전사했는데 확인이 안되었거나 투항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7]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여 조선에 투항한 오카모도 에치고라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고여무(沙古汝武), 사여모(沙汝某), 사야가(沙也可)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사고여무는 복성이다. 사여모(沙汝某)는 단성 인지 복성인지 확실하지 않다. 사야(沙耶), 사야(紗弥)는 주로 성보다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야라는 지명도 여러 있다. 사야가(沙也可)의 경우는 사야가라는 이름의 여러 해석 때문에 성인지 이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의 일본 장수 성명은 일본 기록과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