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말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은
요사 지리지를 주에 두고 요사, 고려사를 부로 삼아 고찰한 연구였습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의 고려 서북계와 요사 지리지를 토대한 고려 서북계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요사와 요사 지리지는 고려의 서북계가 분명 잉커우~무순~장춘 라인이라 증언하고 있으나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 서북계 및 동북계가 모두 서북한과 동북한에 그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두 사서는 편찬 시기가 크게 차이가 나서 일백 수십 년 가량됩니다
요사는 원나라 14세기, 고려사는 조선 15세기에 편찬이 됐습니다
24사에서 요사를 문제 삼는 것은 그 기록이 왜곡됐다거나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빠지거나 생략된 것이 많다는 견해에 기반한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ㅡ 요사
ㅡ 명일통지
ㅡ 명사
ㅡ 원사
ㅡ 금사
ㅡ 통전
ㅡ 자치통감
ㅡ 독사방여기요
ㅡ 도서편
ㅡ 신당서
ㅡ 고려사
ㅡ 동국통감
ㅡ 송사
ㅡ 삼국사기
등의 비교 고찰을 통하여
1) 고려 서경은 고구려 평양이 아니다
2) 고구려 평양은 요동에 있었다
3) 고려의 서북계로서의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동의 혼하~청하이다
등을 고찰하여 보인 바 있습니다
요사와 고려사는 상근한 시대를 다루고 있음에도 왜 이런 차를 보이는 것일까
무엇을 더 신뢰해야 하는가
공민왕 시대에 고려는 분명히 두만강 이북과 지금의 요심지역인 동녕부를 정벌하여 영토를 일시에 회복하였습니다
명과 고려의 경계는 분명히 현 혼하 지역인 봉집현으로, 봉집현을 중심한 동서 500리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국경을 맞댄 요와 명이 스스로 이 지역이 고려와의 경계라고 적고 있음에도
조선은 왜 고려의 북계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해 적고 있는 것일까요?
공민왕의 고려가 요동과 남만주를 수복하였으나 행정적으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 했고
요동을 명이 장악하였고
여말선초 여진족이 이성계 휘하에 있다가 명에 가 붙고, 태종 시대에 태종의 숙청작업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소위 두만강 안팎의 동북면이 여진족 판도가 돼 있었던 사정 등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명의 국제질서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소중화주의(기자 숭배)가 판을 치면서, 또 위화도회군에 대한 자기변명으로써 조선은 역사와 역사지리에 대한 자기합리화, 자기모순에 빠졌으며 그것이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시대 역사서에 반영이 되었다 봐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24사는 결코 타국이나 타민족에 유리하게 기술된 사서들이 아닙니다 춘추필법에 의해 저들의 역사와 역사지리에 유리하게 작성된 것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의 역사서보다 훨씬 더 고려의 강역을 넓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쭝궈 ㅡ 여기까지 너네 땅이었어
조선 ㅡ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우리는 한반도 안에서 놀았어
고려사는
ㅡ 고구려에 비하여 고려의 영토는 서북은 작았으나 동북은 더 넓었다 하며 그 영토가 고구려에 근접한 것으로 지리지 서문에 적고 있으면서
ㅡ 동시에 지금의 평양을 단군과 기자와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었다고 적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ㅡ 또한 주석으로서 공험진을 현 목단강시에 해당하는 백두산 동북쪽, 두만강 이북 소하강 가로 고찰하여 당시의 6진 개척과 실측 정보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ㅡ 함주에 속하는 동북 9성의 위치를 모두 두만강 이남에 비정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나라의 요사 지리지가 직접 현 요양이 고구려 평양이며 고조선의 왕검성이라 적고 있음에도
조선의 고려사 지리지는 현 평양이 그곳이었다고 적고 있는
이 격차와 의문을 푸는 것이 고려의 실체에 더 다가가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고려사의 기록들 스스로가 상이하거나 상반되어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들을 가려내고 추려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서의 경우 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명사 등에서 우리의 역사영토를 한반도 안에 우겨넣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특히 독사방여기요의 경우 산동8과 산동9의 기술 내용이 상이하여 산동9에서 요동과 만주의 역사지리정보를 한반도의 평안도와 함경도에 비정하려는 노골적 태도가 나타납니다
즉 우리의 역사지리 정보가 꼬이고 혼탁해진 시대가 중국과 우리 모두 15 세기부터 나타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