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조선箕子朝鮮 위치
... 기자조선: 은殷 태사인 기자의 기箕나라로 은허 근처 고대 도시인 업鄴(한단시 邯鄲市 임장현臨漳縣)
기자(箕子)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 이름은 서여(胥餘)이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기(箕)나라에 봉해졌다. 주(紂)왕이 포악한 것을 보고 간했지만 듣지 않자...
그 후에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물리친 후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을 청하고 구하니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周) 무왕(武王)에게 전했다
이에 무왕(武王)은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되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출처] 38-0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8.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03/10) <홍범구주(洪範九疇)②>
그 후 기자(箕子)가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올 때, 은나라의 폐허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어 기자는 상심하여 통곡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울고도 싶었으나 아녀자 같을까봐 맥수(麥秀)라는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출처] 38-04[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8.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04/10)
진나라 정공(定公) 14년(기원전 498년),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 봄에 간자가 한단(邯鄲) 대부 조오(趙午)에게 말했다. “위(衛)나라의 백성 500가(家)를 내게 돌려주면 내가 그들을 진양(晉陽)으로 옮기겠다.”조오가 허락한 다음 돌아갔으나 그 부형에게 고하자 부형들이 동의하지 않아 말을 어기게 되었다.조앙(趙鞅)은 조오(趙午)를 잡아 진양에다 가두었다.
조앙이 한단 사람들에게 고하기를,“내가 개인적으로 오(午)를 죽이려는데 여러분들은 누구를 세우고 싶은가?”라 하고는 드디어 조오를 죽였다.조직(趙稷)과 섭빈(涉賓)이 한단에서 반발했다.
진(晉) 정공(定公)이 적진(籍秦)에게 한단을 포위하게 했다.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은 조오(趙午)와 잘 지냈기에 적진(籍秦)을 돕지 않고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동안우(董安于)가 이를 알게 되었다.
[출처] 43-06/2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3.조세가(趙世家) (06/23) <조간자(趙簡子)>②
※주) 은殷시대 기자의 기箕나라는 은허 부근으로 추정되고, 기자가 주 무왕을 방문할 때 은나라 페허인 은허를 지났으니 은허 북쪽이 기자조선이니, 은허근처 비어있는 고대도시인 업鄴(한단시 邯鄲市 임장현臨漳縣)을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비정한다
※주) 업鄴에 있던 기자조선은 기원전 500년 경에
서북쪽인 산성성 중부 중산국이나, 북쪽인 고죽국의 석가장시 부근
또는 동쪽인 예맥조선의 창주시滄州市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마천 사기의 조趙세가, 연燕세가에 나타난 산서성 주요 지명 비정 <<<------
■ 중산국中山國 위치
..... 중산국 : 중산국을 공격한 진晉 위魏 조趙와 가까운 산서성 태행산맥 중간의(中山) 장치시長治市
※주) 한漢 시대의 오환烏桓족이 중산국 후손으로 추정된다
[출처]] 춘추전국시대 중산국中山國의 위치는 산서성 중부 장치시長治市다 (daum.net)
■ 대代나라 위치
(1) 춘추시대 말인 조趙나라 초기에는 중모인 안양 림주시林州市
(2) 조趙무령왕이 중산국 정벌 전에는 중산국과 대나라를 혼용해서 사용했기에 대나라는 장치시長治市
(3) 조趙무열왕이 중산국 정벌 후에는 평요고성平遙古城이 대군(代郡)
※주(1) 한漢 시대의 오환烏桓족이 중산국 후손으로 추정된다
[출처] 림주시林州市인 중모가 대나라
--> 전국시대 대나라(代)는 중모(中牟, 현재 학벽鶴壁 서쪽) 부근이다 (daum.net)
※ 주(2) 장치시長治市가 대나라 : 상산(한단부근) --> 대나라(장치시) --> 상당(장치시와 임분시 사이)
조趙 무령왕 19년(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숙부 공숙성(公淑成)의 집을 찾아가서 친히 그에게 청하면서 말했다. 상산(常山)으로부터 대(代)나라, 상당(上黨)에 이르는 동쪽은 연나라, 동호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누번(樓煩), 진(秦)나라,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병으로 방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출처] 43-14/2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3.조세가(趙世家) (14/23) <조 무령왕(趙 武靈王)>③
※ 주(3) 평요고성平遙古城을 대군(代郡)으로 추정 : 운중은 진중시으로 추정
무령왕 26년(기원전 300년)에 다시 중산을 공격하여 북쪽으로 연나라와 대나라까지, 서쪽으로 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까지 이르는 땅을 탈취했다.
[출처] 43-15/2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3.조세가(趙世家) (15/23) <조 무령왕(趙 武靈王)>
■ 상산常山 위치
상산常山(항산恒山)을 한단시와 형태시 사이의 북무당산北武當山
※주) 지식백과에 상산(常山)은 항산(恒山)이라고 불렀는데...
지주산(砥柱山)과 석성산(析城山)은 왕옥산(王屋山)까지 이어진다.
태행산(太行山)과 상산(常山)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출처] 02-03[史記(사기) 本紀(본기)] 권02. 夏本紀(하본기) (3/6) - 제우(帝禹)
※주) 왕옥산 다음이 태행산이다 따라서 태행산맥 남쪽에서 북쪽 순으로 ①왕옥산(王屋山), ②태행산(太行山), ③상산(常山), ④갈석산(碣石山) 이니, ① 왕옥산(王屋山)은 濟源市 부근이고, ② 태행산은 초작 운대산焦作云台山이니 학벽시 부근이고, ④ 갈석산은 장석암이니 형태시 북쪽이니, ③ 상산常山은 한단시 근처
※ 따라서 상산常山은 한단시와 안양시, 그리고 장치시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산이니
한단시 근처의 북무당산北武當山이 상산常山으로 추정된다
■ 운중雲中, 안문雁門, 조 무령왕이 새로 설치한 대군代) 위치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습시켜 북쪽의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찔렀다.
장성을 쌓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군(郡)을 설치했다.
[출처] 110-2/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2/15)
※주) 합벽시 부근의 대나라, 장치시 부근의 대나라(중산국)를 정벌했으니, 북쪽인 평요고성, 진중시와, 태원시를 정벌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 운중雲中은 진중시晋中市으로 보이고, 안문(雁門은 태원太原으로 추정되고,
창치시의 대代는 이미 조나라 땅이니 새로 설치한 대군(代郡)은 평요고성平遙古城로 추정된다
■ 한漢나라 초기의 진양晉陽,마읍馬邑, 대代 땅 위치
조趙 양자 즉위 4년(기원전 472년)에 지백이 화가 나서 한씨와 위씨 양가를 이끌고 조씨를 공격했다.
조양자가 겁을 먹고 달아나 진양(晉陽)을 지켰다. 지백과 한씨와 위씨 세 나라가 진양을 1년 넘게 공격하다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다 성으로 흘려보내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벽이 3판(三版:24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43-08/2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3.조세가(趙世家) (08/23) <조양자(趙襄子)>
◯ 진중시晉中市는 분수가 20Km 거리에 있고, 조가(趙家)의 봉읍인 경(耿)나라의 땅인 하진시河津市는 분수가 있다 따라서 진양晉陽을 하진시河津市로 비정한다
한(漢)나라가 막 천하를 평정하고 한왕(韓王) 한신(韓信)을 대(代) 땅으로 파견하여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흉노가 대거 기습하여 마읍이 포위되자 한왕 한신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흉노는 한신을 손에 넣자 그 기세를 타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해 구주산을 넘어
태원(太原)까지 공격했고 진양성(晉陽城) 아래까지 진격했다.
[출처] 110-4/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4/15)
◯ 마읍(馬邑)은 운중 땅으로 진중시 晉中市다
◯ 구주句注는 산서성山西 태원시太原市 양곡현陽曲縣 북서쪽 갈고리 모양의 산으로 보인다
한고조 7년(기원전 200년), 한(漢)나라가 막 천하를 평정하고 한왕(韓王) 한신(韓信)을 대(代) 땅으로 파견하여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 신(韓王 信)을 공격하자, 한왕 신은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반란을 도모했다.
흉노의 부장 백토성(白土城)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이 옛 조나라의 장수였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에 나섰다.
마침 겨울이라 병사들 열에 두 셋이 손가락이 얼어서 떨어져 나가자 결국 평성(平城)으로 물러났다.
흉노는 한나라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 뒤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번쾌에게 대(代) 땅에 남아 평정하게 하였다. 형인 유중(劉仲)을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출처] 08-15[史記(사기) 本紀(본기)] 권08.高祖本紀(고조본기) (15/19)
◯ 1) 마읍馬邑은 진중晉中이다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신을 공격했고, 한왕 신이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반란을 도모했으니
마읍馬邑은 태원太原근처인 진중晉中이다
제가 말한 고고학적 증거라 하면요
그간 중국에서 발굴해서 작성한 보고서는 공개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그결과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서 님 논지를 뒤받침할 수 있느냐를 물어본겁니다.
어찌 님이 그걸 다 발굴합니까? ㅎㅎ
최소한 님이 상정한 지역에서 발굴이 몇건은 있었을 겁니다.
아니 이제 삼한까지 중국역사로 만들어 버리네
정신차려요 중국에 삼한이 있고 삼국이 있었다면 그 역사는 중국역사죠. 도대체 왜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해대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중국 중원대륙이 부러워요? 그런 거대한 세력과 접해있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킨 조상님들이 자랑스럽지 않고요?
현재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우리 역사인
반도사관인 식민사관을 계속 주장하고 고집한다면...
앞으로 50년이내에...
우리 선조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다 빼겨서
경상북도인 경주 서라벌 역사만 우리 선조역사로 남을 것 같습니다
1) 이미 고조선 부여 등 만주역사는 중국에 넘어 갔고,
2) 고구려도 중국 역사로 편입시켰으니 북한지역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된 것 같고
3) 중국이 백제까지 자기들 역사라고 할 근거를 마련했으니
충청도 전라북도 역사도 조만간 중국 역사가 될 것 같고..
4) 경삼남도와 전라남도 가야역사는 일본이 자기들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고
국민들 모르게 강단 역사학계가 일본 주장을 밀고 있습니다
합천과 남원 고분군 문화에 일본서기의 임나 지명을 붙여서
가야 세게 문화 유산 등재를 신청했으며
일본은 학교에서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가야이니 일본 역사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배웠고 알고 있는 식민사학을 계속 주장하고 고집한다면
우리 선조 역사는 경주의 서라벌 밖에 남지 않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