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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1 월 들어 계속
ㅡ 고려시대의 압록강
ㅡ 강동 6주
등을 사서 비판을 통하여 고찰ㆍ탐구하여 왔는데요
이를 통하여 부족하게나마 여러분께
ㅡ 거란과 고려의 경계로서의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동요하, 또는 혼하이다
ㅡ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혼하 근방의 타수 지역이다
ㅡ 강동 6주는 요하~동요하 유역이다
ㅡ 요의 보주ㆍ내원성은 지금의 압록강 하구의 남안이 될 수 없다
ㅡ 거란이 강동 6주에 집착한 이유는 이 지역의 금광, 철광, 물산의 안정적 확보를 위함이었다
등의 결론에 도달하여 보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찰을 하면서
강동 6주와 압록강이 지금 학계의 통설로 비정된 서북한 지역이 아님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는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 이전에 이미 요동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료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사를 다시 샅샅이 되 살펴보던 중
서희 열전에서 광종 시기 일을 언급한 것을 재발견하였고
다시 이를 빌미로
태조부터 성종까지 고려사를 내리 읽어갔습니다
그러나 광종 대 기록에서조차 요동 확보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키워드 검색을 통하여
고려사 지리지와 성보에서 관련 기록을 추가로 확보하였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맞아 벌인 조정의 대책 논의에서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는 발언을 합니다.
만약에 광종이 차지한 영역이 지금의 압록강 이남 서북한 지역이었다 한다면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라는 표현은 들어갈 필요가 없겠지요.
또 동경이 있던 요양에서 지금 학계 통설에 평안남도 안주로 비정된 안북부까지 '수백리'라는 표현은 사리에 맞지가 않지요
어림잡아도 천 리는 족히 넘어보이는 거리인데 수백 라고 표현했을리가 없지요.
(이는 고려 전기의 안북부가 지금의 평안남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는 하나의 근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고려사 지리지와 성보에는 광종 시기에 이 지역에 성을 쌓은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대의 공간적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부가하여 알고 계셔야 할 사실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고자 군사를 집결해 출병지로 삼은 곳은 요하의 서편, 요택의 서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거란이 우리가 익히 통설로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요동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또 고려의 당시 서북계가 지금의 압록강에도 미치지 못 했다면 요택에 물이 차서 출병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거란은 985년 출병계획을 포기하고 그 7 년 후인 992 년에 고려를 침략해 옵니다.
게다가 해당 기록에는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한다(東征高麗)"라고 돼 있습니다. 요동반도가 거란의 땅이었으면 어찌 이런 표현이 나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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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 열전 서희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熙又奏曰,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實恐我也.”
2.
고려사 권82 지 권제36 병2(兵 二) 성보
〈광종(光宗)〉 11년(960)에 습홀(濕忽) 및 송성(松城)에 성을 쌓았다.
十一年 城濕忽及松城
3.
고려사 志 卷第三十六 兵 二 성보
(973년)
가주(嘉州)에 성을 쌓았다. 1,519칸이다.
城嘉州一千五百十九閒.
4.
고려사 志 卷第十二 地理 三 북계 안북대도호부 영주
(#가주 ㅡ 학계 통설에서는 가주를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가주(嘉州)는 본래 고려의 신도군(信都郡)이다【고덕현(古德縣)이라고도 한다.】. 광종 11년(960)에 습홀(濕忽)에 성(城)을 쌓고 가주(嘉州)로 승격시켰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라 불렀다. 고종 8년(1221)에 반역이 있어 무녕(撫寧)으로 강등시켰다. 〈고종〉18년(1231)에 몽고병을 피해 해도(海島)에 들어갔다. 원종 2년(1261)에 육지로 나와서 태주(泰州)·박주(博州)·무주(撫州)·위주(渭州) 등을 모두 본 군(郡)에 예속시키고 5성겸관(五城兼官)을 삼았다. 뒤에 나누어서 태주·무주·위주 3주(州)를 설치하고 오직 박주만을 그대로 〈가주에〉 예속시켰다. 공민왕 20년(1371)에 이르러 또 나누어 박주를 설치하였다.
嘉州本高麗信都郡【一云古德縣】. 光宗十一年, 城濕忽, 陞爲嘉州. 成宗十四年, 稱防禦使. 高宗八年, 以叛逆, 降稱撫寧. 十八年, 避蒙兵, 入于海島. 元宗二年, 出陸, 以泰·博·撫·渭等州, 皆屬本郡, 爲五城兼官. 後析置泰·撫·渭三州, 惟博州仍屬. 至恭愍王二十年, 又析置博州.
5.
遼史 二國外記 高麗 聖宗統和三年(985)秋七月
聖宗 統和 3년(A.D.985; 高麗 成宗 4) 가을 7월에 모든 道에 詔勅을 내려 武器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高麗를 정벌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였다가 8월에 遼나라 진펄이 卑濕한 까닭으로 出兵을 중지하였다.
[統和] 10년(A.D.992; 高麗 成宗 11)에 東京留守 蕭恒德으로 하여금 高麗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統和] 11년(A.D.993; 高麗 成宗 12)에 王治가 朴浪柔를 파견하여 表를 올려 罪를 自認하므로 詔勅을 내려 女直國 鴨綠江(원문에는 鴨淥江이라 돼 있음)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聖宗統和三年(985)秋七月, 詔諸道各完戎器校勘 , 以備東征高麗. 八月, 以遼澤沮洳, 罷師. 十年, 以東京留守蕭恒德校勘 伐高麗. 十一年, 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 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