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치점
1) 당빈의 장성은 노룡이 동단점으로 태강/진서지리지 갈석은 현 노룡에 위치
2) 태강지리지는 서진 태강 연간이 아니라 당빈의 장성 보축 이후에 작성
2. 이견
1) 주류 학계
ㅡ 3세기 말 북평지역으로 침입하는 선비족을 방비하고자 당빈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장성을 보축
ㅡ 313 년 낙랑군이 '서북한'에서 노룡 지역으로 교치, 또는 의무려 지역으로 교치 후 다시 노룡 지역으로 교치
ㅡ 태강지리지의 기술 내용은 당빈 당시인 태강 연간이 아니라 낙랑군 교치 이후에 작성
ㅡ 태강/진서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은 진황도 지역이 아니라 노룡 지역
2) 비주류 학계
ㅡ 3세기 말 북평지역으로 침입하는 선비족을 방비하고자 당빈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장성을 보축
ㅡ 낙랑군은 '서북한'이 아니라 본래 위치인 의무려산 일대에서 노룡지역으로 교치, 또는 본래 위치인 현 요동 지역에서 노룡 지역으로 교치
ㅡ 낙랑군은 313 년에 교치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에 교치, 또는 의무려 모용씨 세력 하의 낙랑/대방과 서진 통치 하의 낙랑/대방 병존
ㅡ 태강지리지의 기술 내용은 당빈 당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작성
3. 더 논의할 점
0) 비주류 학계의 일부 논자들은 노룡이 아니라 보정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 비주류 학계의 일부 논자들은 태강/진서 지리지 내용을 근거로 처음부터 한사군이 현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0과 연결)ㅡ하는 주장을 펼쳐 오고 있음
2) 노룡과 북평의 위치가 서진 시대와 당나라 시대가 달랐을 정황이 사서 곳곳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3) 서기 240 년을 전후한 소위 기리영 전투 시기에 이미 낙랑/대방이 하북성 지역으로 교치돼 있었을 가능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음
4. 본인의 견해
ㅡ 2-2)와 3-3)
ㅡ 다만 낙랑군은 애초 현 요동지역이 아니라 현 대릉하/의무려 일대에 있었다 판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