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비 복식.
백제
열도의 고대 문화에 보이는 고구려_백제_신라_고려풍의 복식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부 귀족들이 들어가서 나라 헤이안 시대의 극소수
귀족시대를 열게 됩니다.물론 일부 고구려계도 들어가죠. 이때부터 사찰 위
주에 머물던 아스카 도시문명에서 본격적으로 급격한 도성 체재가 나타나
게 됩니다.이런 백제. 고구려계 귀족들의 언어부터 복식이 어떤 모습의 연장
이였을까요?
7세기에 세워진 당의 어쩌고 하는 의상이나 열도에 나타나는 7세기말 8세기
초의 의상들을 보면 기본 우리 계통의 의복양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제 열도에도 이시기에 마치 일본서기의 내용을 교묘히 조작해서 가야 백
제 도래인의 역사를 열도 자체 역사로 만들어내는 시도를 하듯 이런 우리의
의복이나 영향력을 마치 당풍 어쩌고 하지만 실제 견당사보다 신라 발해의
유학과 문물교류,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입김이 더욱 직접적
이고 압도적으로 많았던 건 기록을 통해서 새삼 확인되는 사항임)
당(唐 618년 ~ 907년)은 선비계열 이연(李淵)이 세운 나라로 천년사직 고구려에 패망한 수나라 이후에 7세기 초반에 들어선 왕조.
웃기지 않음? 고작 7세기 초반에 들어선 당나라 복식을 보고 도리어
천년사직을 누리고 있던 고구려 복식 문화(선대 고조선 복식 문화를
이은) 중 누가 선이고 누가 후자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십니까?ㅋ
원나라 고려풍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
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
지 않고 복식이 날 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
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숙원잡기]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
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
윗 기록은 원나라시절에서 명시기까지 고려풍(조선)이 워낙 세서 세상이 미
쳤니 요사스럽니까지 나오는 기록임.
조선시대 예복이고 의복들이
이런 고조선 삼국시대로 흘러온 주름치마 양식부터 관모,
옷여밈새의 한결같은 처리방식,소매,폭, 무늬,색상 및 기타 장식류와 신발등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고유의 정체성과 특색
을 유지하면서 계승되어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