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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5-13 15:39
[한국사] 위구르님 글에 대한 반론제기
 글쓴이 : 하이시윤
조회 : 279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201721&sca=&sfl=mb_id%2C1&stx=Israel
첫번째 그림은 위구르님의 위치비정
두번째 그림은 윤내현교수님의 위치비정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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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시윤 24-05-13 16:04
   
위만조선은 서한후기에 존재한 지방정권입니다
위구르님이 상정한 지역이라면 서한의 유물이 나와야 하나
나오지 않습니다 외려 요동반도 남쪽에서 후한의 유물이 나옵니다
즉 서한시대에 한나라는 요동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누가 있었을까요. 기록은 단군조서의 거수국인 진국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상 역계경은 전쟁 이전 우거왕의 대한(對漢) 정책에 반대했으나 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본인 휘하의 민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때 기록에 분명히 동쪽으로 갔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요동에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진국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당시 동아시아 판도는 두번째 그림으로 상정됩니다
분명히 위만정권은 단군조선의 사회적 모순 즉 봉건제의 모순을 파고들어 대읍ㅡ진번 등ㅡ을 정복했다고 봅니다만 기껏해야 삼대에 걸친 서한의 외번인 지방정권입니다. 그나마 한사군도 쫏겨나 겨우 난하일대의 낙랑군만 남았습니다. 단군조선지역은 위만정권의 붕괴이후 열국시대로 진입합니다. 이게 바로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이라는 논총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개정판도 나왔으니 일독을 권유합니다
     
위구르 24-05-14 18:56
   
저도 원래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윤내현 교수의 비정과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 책도 1년 전 즈음에 읽었죠

거기서 더 서쪽에 있는 영정하가 요수고 위만조선이 한나라를 선제공격해서(섭하를 죽일 때) 저기까지 차지했다고 봤는데(https://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98709&sca=&sfl=wr_subject&stx=)

왕험성과 렬수의 위치가 고민거리입니다

난하가 패수고 영정하가 요수인 점은 이해가 됐는데 렬수의 위치가 고민이었죠

洌水를 딱히 비정할 강이 있나 싶습니다

왕험성은 그 강에 부근에 있으니 함께 비슷한 곳에 비정해야 하지만 저로서는 찾기가 힘듭니다
          
하이시윤 24-05-14 20:36
   
열수와 왕험성에 대해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개정판이 아닌 원판을 보셔야합니다
윤교수님이 좀 국수주의적으로 바뀐후 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이시윤 24-05-14 20:54
   
“史記(사기)” “朝鮮(조선)列傳(열전)”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한 “史記(사기)集解(집해)”의 주석이 실려있는데 거기에는 삼국시대의 魏(위)國人(국인)인 張晏(장안)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에는 濕水(습수), 列水(열수), 汕水(산수)가 있는데, 이 세강이 합하여 열수가 된다. 아마도 樂浪(낙랑)의 朝鮮(조선)은 그 이름을 여기에서 취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것은 이 논문의 논리 전개에 관계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장안의 말 가운데는 고조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잇다. 그것은 낙랑의 조선지역에는 열수가 있었고 그 열수에는 열수, 습수, 선수 세 지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낙랑지역에는 고조선과는 다른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낙랑지역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그 지역에 설치되기 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고 그 전에는 고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습수, 열수, 선수의 세 지류가 있는 열수를 찾아낸다면 그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있는 강들 가운데 이러한 명칭을 가진 세 지류를 가지고 있는 강은 지금의 난하밖에 없다

지금의 난하가 濡水(유수)로도 불리어진 바 있음은 앞에서 말하였는데 “水經注(수경주)” “濡水(유수)”조를 보면, 유수가 흐르는 도중에 무열계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武列水(무열수)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앞의 세 지류 가운데 하나인 열수는 무열수의 악칭인 것이다.
중국문헌에서 이와 같이 약칭이 사용된 예는 흔히 있는 것으로 청장수를 장수, 압록수를 압수로 표기한것은 그 예이다. 지금도 난하 지류에는 무열하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리고 “수경주”에는 유수와 합류하는 강으로 濕餘水(습여수)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약칭이 습수였다고 생각된다. 또 유수의 지류로써 龍鮮水(용선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용선수의 약칭이 鮮水(선수) 또는 汕水(산수)였다고 생각된다. “사기색은”에 조선의 명칭에 대해서 언급 하면서 鮮(선)의 음은 仙(선)인데 汕水(산수)가 있었으므로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鮮(선)과 汕(산)은 통용되었음을 알게된다 . 이상의 고찰로써 습수,열수,산수가 합류하였던 열수는 유수로서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게 된다.

ㅊㅊ. 한국고대사신론

洌水에 대한 윤교수님의 문헌고증입니다
결론ㅡ이상의 고찰로써 습수,열수,산수가 합류하였던 열수는 유수로서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게 된다.
하이시윤 24-05-14 21:06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인데 그 가운데 “蠻夷(만이)와 옛 燕國(연국). 齊國(제국)의 망명자들이 그(위만)를 왕으로 삼으니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왕험에 대한 주석을 보면 “史記集解(사기집해)”에는,

徐廣(서광)은 말하기를 昌藜(창려)에 險瀆縣(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고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韋昭(위소)는 말하기를 (왕험은) 옛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은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응소는 “한서 지리지”에 주석 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舊都(구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주석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위소는 왕험을 읍의 명칭이라 하였고, 서광과 응소는 險瀆(험독)을 王險(왕험)과 같은 뜻으로 파악하였으며 신찬은 이것을 王險城(왕험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왕험. 험독. 왕험성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도읍에 대한 명칭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위만조선 지역의 언어 즉 고대 한국어가 漢字化(한자화)된 것임이 분명하며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도읍으로 기록된 아사달. 평양성과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통치자를 壇(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 하였으니 “사기 조선열전”의 王險(왕험)과 신찬이 말한 王險城(왕험성)의 왕험은 단군왕검의 王儉이 달리 표기된 것이다. 결국 險瀆(험독). 王險(왕험). 王險城(왕험성). 王儉(왕검). 王儉城(왕검성). 阿斯達(아사달). 平壤城(평양성) 등은 한국 고대상에 나타난 도읍에 대한 다른 호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기집해”와 “사기색은”은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곳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위치를 보면 서광의 창려 험독현, 응소의 요동 험독현, 신찬의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서광. 응소. 신찬이 말한 지역이 각각 다른 곳인가, 아니면 같은 곳에 대한 다른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록에 따라 그 위치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하이시윤 24-05-14 21:08
   
먼저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은 어디인가? 서광은 晉(진)시대의 인물이므로 우선 진시대의 창려 험독현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평주에 창려군이 있었는데 그 주석을 보면,

漢(한)시대에는 요동속국의 도위에 속해 있었으며 魏(위)시대에 군을 설치하여 두 개의 현을 통령하도록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려군에 속하는 현으로서 창려와 賓徒(從 ?)(빈도(종?)가 적혀있다. 따라서 진시대의 창려에는 험독현이 없었다. 그러므로 서광이 한 말의 뜻은 그전 시대의 험독현이 진시대의 창려군 지역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진서 지리지 창려군” 주석에서 창려가 동한시대의 요동속국에 속해 있었음이 학인된다. 그러나 “후한서 군국지”를 보면 요동속국에는 창려는 보이지 않고 비슷한 명칭으로 창요가 있으며 험독도 보인다. 이에 대해서 顧炎武(고염무)는 “후한서 군국지”의 창요는 창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서 지리지 요서군”에 보이는 서한의 交黎(교려)가 동한시대의 창려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요서군의 교려에 대해서 “응소는 지금의 창려라고 말하였다”고 주석 되어있다. 응소는 동한시대의 인물이므로 이 주석으로 보아 서한의 교려가 동한시대에 창려가 되었음이 분명하며 “후한서 군국지”의 창요는 창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고염무의 지적은 옳다고 인정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남게 된다. 서광은 창려에 험독이 속해 있었다고 했는데, 창요가 창려의 誤記(오기)라면, “후한서 군국지”에 어떻게 창요와 험독이 대등하게 병존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동한시대에는 창려(창요)와 험독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후에 험독이 창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서광이 말한 험독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는 서한시대의 交黎(교려)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서군에는 14개의 현이 있었는데 교려가 영지. 비여. 빈도 다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교려는 이 지역들과 인접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지에는 고죽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응소는 말하기를 옛 고죽성이 있다”고 하였다고 주석되어 있다. 그리고 비여에 대해서는 현수가 동쪽으로 흘러 濡水(유수)로 들어가고 류수는 남쪽으로 흘러 해양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빈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교려에는 渝水(유수)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위치가 분명해 지는것은 영지와 비여이다. 고죽국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고 渝水(유수)는 지금의 난하에 대한 옛 명칭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서한시대의 영지와 비여는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는데 비여는 그 동부연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과 인접되어 있었던 교려도 지금의 난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서한시대의 교려는 지금의 창려군 부근 즉 하북성 동북부에 있었을 것인데 그 지역에 서광이 말한 험독이 있었을 것이다.
     
하이시윤 24-05-14 21:09
   
그러면 응소가 말한 요동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험성은 어디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기 색은”에 “응소는 ”한서 지리지“에 주석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구도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을 보면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滿(만)의 도읍이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기색은”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사기색은”에는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조선왕의 구도였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그곳이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가능성도 시사하여 주고 있으나, “한서 지리지”에서는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이곳을 위만 조선의 도읍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두 기록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 것임이 분명한데 어떻든 요동군의 험독현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에서는 “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다”라고 했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이로부터 험독이 되었다”고 했으며 “안사고는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본 것에 대해서 신찬은 반대하고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으며 그곳과 구별하기 위하여 요동군 험독현이 험독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해서 안사고는 신찬의 견해가 옳다고 지지했다는 것이다. 응소와 신찬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응소가 말한 험독과 신찬이 말한 왕험성은 다른 곳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찬은 험독현이 왕험성과 구별되기 위하여 험독으로 불리어졌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필자는 요동군의 험독현도 원래는 왕험성으로 불리어졌을 것이라는 시사를 받게 된다.
     
하이시윤 24-05-14 21:11
   
그런데 “위서 지형지 창려군조”를 보면 晉(진)시대에 요동을 나누어 창려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창려군은 진시대 이전에는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 지리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려군이 동한시대에는 요동속국에 속해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위서 지형지”에서 진시대의 요동을 나누어 창려군을 설치했다는 요동은 동한시대의 요동속국을 말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진시대의 창려군 지역에 서광이 말한 험독현이 있었고 이 지역이 동한시대에는 요동속국에 속하여 창려(창요)현과 험독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인 서한시대에서 요서군에 속한 교려 지방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창려현 북근이었다.

이렇게 볼때 응소가 말한 요동군의 험독현과 서광이 말한 창려의 험독현은 동일한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先秦(선진)시대로부터 서한 초까지의 중국 요동은 지금의 난하 하류로부터 창려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秦(진). 西漢(서한)시대의 요동군 이었다. 그런데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병합함에 따라 서한의 영토가 동북지역으로 확대되고 행정구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결국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이 지금의 창려 부근이었고 그 곳은 서한시대에 요동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응소가 말한 요동군 험독현이 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과 같은 곳일 것임을 알게 된다.
     
하이시윤 24-05-14 21:11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점이 등장한다. 앞에서 고증한 바에 의하면 서광의 창려 험독현은 “한서 지리지”의 요서군 교려군이었는데 이 곳이 어떻게 같은 책인 “한서 지리지”에 수록된 요동군 험독현과 동일한 지역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한서 지리지”는 서한시대 전기간의 지리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병합함에 따라 서한의 강역과 행정구역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로 요서군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그 때까지 요동군의 변경에 있었던 험독현의 일부 또는 전부가 새로 설치된 요서군에 편입되어 교려라는 지명을 얻었을 것이며 동한시대에는 그 지역에 요동속국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이시윤 24-05-14 21:13
   
이제 신찬이 말한 낙랑군 왕험성을 확인할 단계에 와 있다. 종래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한반도의 평양지역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왕험성도 지금의 평양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 이미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갈석 지역이었다. 그런데 갈석은 전국시대의 연국이래로 서한초까지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었던 곳이므로 낙랑군의 서남부 변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낙랑군의 왕험성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이것을 분명하게 해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왕험성이 조선현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이 있었다. 이 조선현 지역은 중국의 先秦(선진)시대 문헌에서도 조선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위치했던 지역으로서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고증된 바 있다. 그리고 조선현의 위치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에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기자국이 그 말기에 조선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기자국의 도읍이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내에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기자국의 도읍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동부연안에 위치했으며 그곳은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관한 서광. 응소. 신찬의 설 가운데 신찬의 견해가 옳은 것임도 알게 된다.
          
하이시윤 24-05-14 21:14
   
윤교수님 주장의 결론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왕험성은 지금의 난하 중하류의 동부연안에 위치했으며 그곳은 서한시대의 조선현 지역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이시윤 24-05-14 21:16
   
그렇다면 지금의 하북성 창려 부근에 있었던 서광과 응소가 말한 險瀆(험독)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남는다. 험독이라는 명칭이 고대에 도읍지에 대한 호칭이었다는 점이라든가 서광과 응소가 전한 내용으로 보아 이 곳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도읍지(그전은 기자국의 도읍지)인 王險城(왕험성)은 앞에서 확인되었으므로 창려 부근의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조선이라는 동일한 국명을 사용하였으므로 그 도읍지들이 단순하게 조선의 도읍지로만 전해짐으로써 후세에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하이시윤 24-05-14 21:16
   
이상입니다.
상황을 얘기해볼게요ㅡ윤교수님의 기자국설(기자조선이 아니고 변방 거수국인 기자국)을 인정한다면 서광과 응소는 요서하북으로 진출했던 고조선의 왕검성을 얘기했고, 신찬과 안사고는 기자국의 왕검성을 얘기한거죠. 한자화로 인해 임금터-->왕검성으로 표기되었고 고조선은 누층적 읍제 봉건국가였기에 대읍을 차지하면 대읍을 임금터=왕검성으로 호칭된 것이죠. 그래서 난하유역의 왕검성과 창려지역의 왕검성이 있었고 지나기록엔 그외에도 세개의 왕검성이 있습니다. 그중 신찬의 왕검성은 바로 난하유역에 있었습니다
     
위구르 24-05-14 21:48
   
읽을게 많이 생겼군요 참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이시윤 24-05-14 21:54
   
네 어차피 역게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곳이라서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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