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혁거세거서간)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 5 동천왕 21년)
"평양이라는 곳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신화
사기 혁거세전기에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
시조의 성은 박씨, 휘는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였다. 그때 나이 13세였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유민>이 산곡간에 나누어 살며 여섯 촌을 이루었다. 첫째가 알천 양산촌, 둘째가 돌산 고허촌, 셋째가 취산 진지촌[혹은 간진촌], 넷째가 무산 대수촌, 다섯째가 금산 가리촌, 여섯째가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이 진한육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어느 날) 양산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가서 보니 홀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만 있었다. 알을 깨니 어린아이 하나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빼어나게 숙성하였다. 六部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인들은 ‘호(瓠)’를 일러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났을 때의) 큰 알이 박[瓠] 같다 하여 ‘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어로 왕을 이른다[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