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참~ ㅋㅋㅋ
아니 뭐 나도 구한말 이왕가 별로 안 좋아하고 조선이 정신나간 수준으로 사대한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욕하지만,
악의적으로 사실왜곡하며 까진 않아요.
참 한국사회에 유명 좌파 운동권 진보 지식인이랍시는 사람들도 무슨 민중사관 거리면서 식민사관이랑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 진의가 했갈리는 경우가 많음.
이 인간이 알고도 좌파라서 계급 진영논리에 경도돼서 일부러 거짓말하거나 그쪽으로만 대가리가 마비된 건지, 아니면 노파같이 노골적인 쨉알밥시키인지.
어이 븅신님아. 뭐 수탈 많이 당한다 어쩐다는 그런 븅신들(사실이야 맞지만 동시대 타국의 시대상으로 따지면 너무나 분명하게 좌파(나도 굳이 따지면 한국기준 좌파지만) 운동권의 골 때리는 왜곡이고)은 하도 많이 봐서 그러려니 하는데, 이건 뭐 조선이 금 가치도 모르는 수준의 국가라고 구라치는 수준이니 전형적인 쪽국애들인데?
님이 실제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꾸 님처럼 극단적인 예를 들으시면 간접적으로 자국 패배주의 사관에 힘을 실어주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몽골 밑 티벳은 한족 모두를 유린하고 아시아 대륙의 지배자로 굴림한 역사가 있죠
그다음은? 현재 모두 중국의 일부로 합병되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조공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과거 한족과 우호적으로 지내지 않고 중국을 침략한 대부분 나라가 이기든 지든 후에 쪽수에 밀려 중국에 동화된 후에 사라졌습니다
한국은 중국과 우호적으로 지낸 덕분에 오랫동안 존속은 물론 동맹(임진왜란),종교,서적등 많은 문화를 수입할 수 있었죠~
만약 조선 건국때 이성계가 만약 중국대륙을 침략했더라면 nopa님이 원하시는 짧은 영광은 얻을수 있겠죠
다만 그댓가로 중국왕조과의 대대적인 전쟁국면으로 들어가겠지만요
끊없이 계속되는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도 고갈되어 민중들은 고초를 겪겠고 문화따위 신경쓸 겨를도 없으니 아마 세종대왕같은 휼륭한 분도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동학은 쇄국을 주장 하였고 반면에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방을 주장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하응과 동학은 수구세력 이었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제국주의 세력 또는 진보 세력 이었습니다.
당시는 누가 뭐래도 제국주의 시대 였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시대의 흐름으 따라 갈려고 했었던 것이고 이하응과 동학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릴려고 했던 것이죠.
개방과 수구 또는 쇄국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누가 지금의 대세죠?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쇄국의 북한과 개방의 남한 중에 누가 옳냐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고종은 후일 비자금으로 조선 왕실이 보유중인 삼을 팔아서 지금의 HK은행 전신인 상하이 은행에 예치하고 이 돈을 HK은행 꿀꺽하고는 이 돈을 기반으로 지금의 HK은행을 만들죠. 단순히 비자금일 정도의 금액이 엄청난 액수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삼은 오랫동안 보존을 못하죠. 당시의 삼은 고종 당대의 삼 이라는 말이고 그 이전의 왕실은 그 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조선왕실이 가난 했다는 것은 개뻥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당시 경제는 거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상태 였는데 그 것이 이하응이 발행한 당백전 때문이라는 것은 통설을 넘어서 정설입니다. 조선의 경제가 빈사 상태로 된 것은 이하응의 경제 실책 때문이라고요. 고종의 잘 못이 아니라. 오히려 고종은 빈사 상태의 조선 경제를 살린 사람 이죠.
그리고 이 게시판에 이미 많은 의견이 게시 된 것이 조선은 세금을 많이 안 걷었다는 것 입니다. 당연히 당시 사대부나 일반 서민들은 굉장한 부를 소유 하였지만 왕실은 가난 했다는 것이죠. 부국강병이 아니라 부민약병의 정책을 시행해서 그런 것 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부국강병책을 적용 하려 하니 뜬금없이 동학패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당연히 나라가 망하는 것이죠. 위의 지도층이 무능 한 것이 아니라 밑의 소위 민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어야 할 의무은 뭉개고 권리만을 요구 했기에 망한 것 입니다.
비좀 와라님의 의견은 알겠는데,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서
백성들이 참으로 먹고 살기 어려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대원군과 민비가 서로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던 차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순수하게 농민 혁명으로 일어난 동학 혁명군에게
모든 문제의 발단은 관리들의 수탈 문제가 아니라,
민비의 개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순수했던 동학 농민군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민비를 공격하게 만듭니다.
제가 알고 있던 이 역사적인 사실이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은광? 중국은 은본위제죠. 동아시아의 조공은 받는 쪽이 더 많이 돌려주는 게 일반적입니다. 조공이라니까 약탈당하는 걸로 아네?, 당시 조공이 공무역이었다고 하는 이유도 이거 때문이고, 청이 망조들 때도 전세계 은의 절반을 빨아드릴정도로 경제규모가 어마어마하구요. 딱히 조공이 아니라도 규모 때문에 은은 청나라에 빨리게 되어있음...
금광이야기는 민가들이 별것아닌 외과수술에 금광을 줄 정도로 븅신이었다는 이야기고,
그리고 수탈? 뭐 고려나 조선이나 양민이 줄고 노비가 늘고 일부 특권층의 사익만 추구하고 사회는 병들어 망하는 패턴인 건 같은데, 님아? 동시대, 일본이나 유럽이 착취가 없었다고 생각하는지? 일본은 무리한 전쟁비용 어떻게 댔을까? 근대화 이후에도 일본인의 영양상태는 당신이 욕하는 망조들고 수탈당한다는 조선인 보다 더 나빴어요. 가라유키상 같은 걸로 외화벌이하고 살인적인 세금 때문에 딸을 유곽에 파는 게 드문일이 아니었어요. 실제로 그런 게 효도니 하는 븅신 같은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광기가 판치던 게 당시 일본이야. 그리고 산업화시기 유럽에서 아동의 노동 착취나 노동자들의 열악함 같은 걸 보면 딱히 조선이 특별히 가혹한 착취 때문에 망했네 따위는 개소리 밖에 안 돼요.
시대가 변하고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나 예측이 가능한 상태에서 과거의 영광을 못 잊어서 분란을 일으킨 이하응을 말하는 것이고 이에 동조한 세력 특히 동학 남접의 접주와 전봉준을 말하는 것 이죠.
안동에 있던 최제우는 전봉준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전봉준이 교주의 말을 무시하고 자의적의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란이란 말입니다.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은 오랜 우리의 전통이고 종교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거의 90프로 이상 협잡꾼 이라는 말이죠.
모든 힘을 총 집중해서 변화의 파도를 헤쳐나가기도 힘든 판국에 저 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 딴지를 거는 세력이 크니 당연히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죠. 오히려 안 망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세계는 4차 혁명의 시기로 접어 들고 있는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없어요. 구한말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하단 말이죠.
고려는 궁예의 신정 정치질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집단이 왕건을 추대해서 세운 나라 입니다. 당연히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 나라죠. 종교는 과거와 미래에 관점을 두고 정치는 현재를 중시 합니다.
당시 고려왕은 현재의 왕이죠. 당연히 고려왕은 승려의 신분이 아니고요. 만일 고려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형태 이었다면 고려왕은 승려의 신분이거나 고려를 대표하는 특정종단의 종정이 되는 것 입니다.
고려왕은 인간의 대표이지 신의 대표가 아니죠. 그래서 의천대사 같은 고려왕이 승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승려가 된 것이고 의천대사 역시 정치에는 관여 하지 않죠. 고려도 정치는 유학자가 합니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와 신라 모두 동일 합니다. 특히 연개소문 같은 경우는 유학자와 같은 사고방식을 보이죠. 그래서 무당을 혹세무민 한다고 죽이고 도교로의 전향을 강요하는 당나라와 대립하게 되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유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에 특정종교의 개종을 반대하는 입장이죠.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일제시대 일진회처럼 최근 일본 극우성향 재단의 지원을 받고 일본의 논리를 퍼뜨리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국인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독도지킴이’로 유명한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교수는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152회에서 “사사카와 재단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역사를 하나 하나 찾다보면 단편적인 지식에 매몰 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봅니다.
역사에서 한반도가 실제로 자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고대 철이나 조선시대 금이 많이 났다는 것도 채굴기술이 대단하지 않을 때 조금만 파면 광물이 채굴 되니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이고, 조선시대 금이나 지금의 북한 자원매장량이나 수치는 어느 정도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흔히 생각하는 광산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며 채굴하기엔 채산성이 없어서 없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지형이 단단해서 파고 들어가긴 뭐 같지만, 대신에 조금 조금씩 겉에 자원이 매장 됬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될런지도)
이걸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가쓰라 태프트 밀약입니다.
미국이 "조선은 황금의 나라"라는 소문만으로 조선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해놓고는 돈이 안 되는 걸 아니까 일본과 다시 조약을 맺죠.
일본의 경제를 조선이 뒷받침하는 것은 쌀생산량과 가축을 몰수해갔던 부분입니다.
미국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던 조선이지만, 일본에게는 똑같은 것을 먹는 식민지라 먹을 것을 뺐어올 수 있었던 거죠.
최초의 미곡 선물 시장을 만들어서 종이쪽지에 불과한 지폐를 무한정 찍어내서 쌀과 바꿔 갈 수 있었고, 토종 한우가 멸종 되어 지금은 그 모습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잡아갔죠.
미국이 자원을 남겨둘려고 쉐일가스를 이제와서 쓰는게 아닙니다. 쉐일가스 채산성이 안 맞아서 안 캤던 겁니다. 자원이 묻혀있다고 캐면 다 돈이 아니라, 캐내는데 드는 비용 대비한 산출량이 나와줘야 합니다.
이제껏 안 캤던 건 굳이 쉐일가스를 쓰는 것보다 중동 산유국에 진출하는게 훨씬 돈이 적게 들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전에 한미간의 대등한 조약이 있었다는 걸 잊고 말하니까 가쓰라-태프트 조약이 조선에 끼치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를 못 하신 겁니다.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어떻게 가능했고, 또 그것과는 반대 되는 조약이 미일간에 성립 된 배경만 봐도 조선이 소위 금밭이었다는건 틀렸다고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죠.
한국의 산이 벌거숭이가 된 데는 일제의 산림 수탈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선총독부는 국권을 침탈한 1910년부터 산림 현황을 파악하는 ‘조선임야분포도’를 제작했다. 1918년에는 ‘조선임야조사령’을 공포하면서 산림 수탈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1927∼1941년 평안북도과 함경북도, 함경남도의 국유림 지역에서만 6600만 m³의 산림자원이 사라졌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백두대간 일대를 중심으로 수령 200년 이상의 천연림이 사라졌다. 일제가 강탈한 한반도의 산림 자원은 총 5억 m³로 추산되며 이는 현재 경제적 가치로 50조 원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