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1-2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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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낙랑국과 한나라 낙랑군의 토론글을 보고 구글링으로 일제 낙랑 유물 조작설 몇개를 찾아봤습니다. 주장자 이름이 밝혀진 몇개만 올립니다. 중국쪽 조작으로 가면 지명이 나와서 어디인지 이해가 안가네요.* 참고로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본다네요. 우리 학계에서 말하는 평양은 한나라 낙랑군 = 낙랑국이라는 것과 의미가 틀리네요.
1. 점제현 신사비 조작. 위당 정인보:
[ 통상적인 비석보다 낮고 작고 얇은 점, 테두리 바깥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는 점, 비석 뒷면이 울퉁불퉁하여 암벽에서 떼어 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 모서리 글자들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나갔다는 점” 등을 근거.]
북한 역사학계: [1. 점제현 신사비 기초에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이 있고, 돌의 성분이 인근지역의 화강석과 큰 차이가 나며, 그것은 요하지방의 것과
유사하다. 2. 방사성 동의원소 측정 결과 인근 지역과는 2~3천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들어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 또는 위조해서 용강으로 옮겨 놓은 것.]
문성재 박사: [일제가 평안도 용강을 점제현으로 단정한 근거는 위·진대의 투박한 서체로 새겨진 돌 하나뿐인데 이 돌은 한나라 낙랑군과 문헌, 고고, 지리, 과학적으로 관련이 없다.]
2. 낙랑군 호구부(인구조사 명부) 문성재 박사: 가. 낙랑군 호구부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보면 필기구로 추정되는 환두 도자, 관복에 사용될 띠걸이, 무기류, 수레에 설치된
부속물, 여성용 장신구와 도끼, 낫, 굴착도구 등의 농기구 등이다. 고분에서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동시에 출토될 수 없다. 지배층이었다면 농기구를, 농군이라면 지배층인 관리가 사용하는
필기구나 관복에 사용하는 띠걸이를 같이 넣어 묻었을 리 없다.
나. 호구부는 보안 공문서로 개인의 무덤에 부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다. 호구부 조작 근거: ㄱ. 한나라의 목각에 써 놓은 문서 규격들과 비교할 때, 목각 규격의 크기가 일정하게 맞지 않다. ㄴ. 서체가 한나라 때 유행했던 예서체와는 상당히 다름. ㄷ. ‘별’이라는 일본식 접두사 사용. 호구부의 첫 줄에 “낙랑군|초원사년|현별호구|다소□□(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이라고
하였는데 ‘-별’은 ‘-군(君)’처럼,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어다. 묵독 “별
존재 자체가 유물이 위조품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다.
3. 북한에서 발군한 낙랑 고분이 2,600기. 문성재 박사: 가. 북한 역사학자 안병찬은 “북한에서 귀틀무덤은 서기전 1세기 말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100년간 존재했고, 벽돌무덤은 2세기
초에서 3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으며 독무덤은 나무곽무덤 시기부터 벽돌무덤 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주로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고조선고고연구』 제 4호 , 1995)에서 밝혔다.
나. 북한 역사학자 안병찬이 밝힌 것 처럼 2,600기는 귀틀무덤, 독무덤, 나무관무덤, 벽돌무덤 등을 포함한 숫자다.
3. 그 외. 가. 중국계 무덤으로 보이는 양식에서 조차 고조선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대량 발굴 되고 있고, 무덤에서 한대 문화의 흔적이 도드라지지 않아 평양이 낙랑이라고 하는 주장은 어불성설.
나. 일본인과 조선총독부가 중국에서 수시로 낙랑출토류 유물들을 대량 구입한 징후들. ㄱ. 낙랑계 유물들이 유독 평양 안에서만 발견. ㄴ. 중국계로 단정할 만한 세기적인 대발견은 모두 일본인이 했다는 점.
★ 중국의 한나라 낙랑군 조작 의심. 1. 낙랑군 갈석산. ㄱ. 갈석궁과 강녀석의 경우 역사 지리적으로 문제. ㄴ. 중국의 역사학계는 요녕성 서쪽 발해와 접한 수중현을 갈석궁이라고 비정하는데 역대 역사서, 지리서 어디에도 ‘갈석궁 = 수중현’으로
특지한 기록은 없다. ㄷ. 전시된 유물들은 진시황의 행궁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하고, 출토된 유물들과 진시황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 ㄹ. 진시황이 갈석산에 올랐다고 했는데 갈석궁으로 비정한 곳은 평지.
2. 임둔태수장 봉니. 가. 봉니가 발견된 요령성 호로도 태집둔을 도하라고 비정하였는데 도화는 태집둔과 상관이 없다. 나. 태집둔은 평양, 부여 출토품과 유사한 춘추대 말기 비파형 단검이 출토되고 와당, 도기 등 전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 되었으며 북방문화적
특징이 강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고조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 학계에서는 중국계 유물들만 가지고 태둔집을
도하, 요서군 영역으로 비정한다. 라. 도하에 대해서는 《관자》〈소광편〉에 <중원에서는 … 도하를 격파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당대 윤지장은 주석을 <도하는 동호의 조상이다.> 라고 하였다. 《묵자》〈비공편〉에서 <예전의 도하가 연, 대, 호맥 사이에서 멸망 … 했다>며
이러한 사료적 근거를 종합해 보면 <실제의 ‘도하’는 요령성이 아닌 하북지방에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도하는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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