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谷)’이라 하였으니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殷)이] 쇠약(衰弱)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토(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의 상류(上流)에까지 이르렀다.
왕(穆王)이 후(後)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부(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楚)나라에 알려서 서국(徐國)을 치게 하니, [조부(造父)는] 하룻만에 [초(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초문왕(楚文王)이 대병(大兵)을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만명(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진(秦)나라가 육귝(六國)을 합병한 후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방의 이(夷)를 모두 분산시켜 진(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후한지 동이열전 '서'편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후한지 동이열전 '예'편
전해 내려온 말에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시켜서 남녀 아이들[童]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봉래(蓬萊)의 신선(神仙)을 찾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들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그들은 대대로 이어져서 수만 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후한지 동이열전 '왜'편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그 나라(진한)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철(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후한지 동이열전 '한韓'편
위에 지도는 대충 구글링해서 퍼온것이니 태클은 사절입니다.
어쨌든 위에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구이(九夷)가 나와있기도 한데...
저들이 춘추전국시대까지도 어느 정도 존재하다가, 결국 다른 나라에 합병되고 맙니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백성이 되었죠.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고, 진시황 무덤 만드는 일로
농민반란이 발생하고, 망했던 각국의 후예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하는게 초나라 패왕 항우와 한나라 고조 유방이죠)
위에도 이 무렵 진나라의 백성들은 물론,
한나라 초기 제후국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혼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수만명이 도망친걸로 나와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의 친구이자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했고,
그의 수하인 위만은 고조선으로 항복했다가 준왕을 몰아내죠.
진한 사람들은 주로 진나라에서 도망친 유민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살고 온 사람들이라 일부 용어 사용은 중국풍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만..
마한 사람들이 땅을 내어주고 상당히 잘해줬을 뿐 아니라,
이들이 딱히 마한이나 변한과 크게 언어가 다르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료에 '다른 점이 있다'고 적혔다고, 완전히 말이 안통한다는 소리라는게 아니죠.
약간 다르다. 많이 다르다의 차이는 큰 것입니다.)
즉, 말이 기본적으로 통하고, 의심이나 배척을 받지 않았던 동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의아니게 중국땅 조선족 되버린 케이스랄까요.
그리고 변한에 대한 내용을 보면, 왜와 가까워 문신한 사람이 많다고 적혀있습니다.
이게 뭔소리냐... 왜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소리지요.(왜인 포함)
이미 철을 화폐로 하여 무역을 하는 상태였고..
왜처럼 문신한 자들이 돌아다녔다는 말은 즉슨, 마한과 변한, 진한 할거없이 이미 왜와 교류 중이었습니다.
바다로 못다니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무역과 다른 이유로 뻔질나게 왜열도를 돌아다녔다는 소리죠.
진시황이 파견한 서복은.. 3천명의 동남동녀.. 즉, 소년소녀들과 기타 장인들과 수행인원 포함 5천명 정도로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제주도에 상륙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까지 갔는지 관련 이야기가
좀 전해져내려오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근데, 서복은 기본적으로 불로장생을 연구하는 당대로 치면 석학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죠,.
그의 주변에 있던 인물들도 기술과 과학, 지식에 있어 뛰어난 인재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남동녀들은 나이 어린거 빼곤 별 영양가가 없다쳐도)..
그런 인재들이 진나라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했으면 진나라 수준의 문명은 금새 구축했겠죠.
그러나 그 정도였는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일본쪽에선 서불을 학문과 의료술의 신으로 모신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리고 재밌는 게... 서복(徐福)은 서(徐)국의 서(徐)와 같은 성씨입니다.
삼국지 유비가 도겸의 후사를 이어 주자사가 된 서(徐州)란 지역도 있죠.
서주의 중심인 하비는 사수와 회수에 둘러싸인 곳입니다.
첫째. 고조선의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둘째, 기자조선 후손설(기자조선 마지막 왕이 정착하면서 지명의 첫글자를 딴것)
셋째, 백제왕족 후손설이 있는데..(당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성씨가 서씨)
이 중 가장 연대가 앞서는게 바로 첫번째 예국 군장 여수기余守己의 후손설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한 서徐국도 이 사람의 후예로 보이는데요.
余 +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인것으로..
서씨는 '여씨 사람들, 여씨의 후예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죠.
예국은 대략 훗날 한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들의 후예가 중국 황하와 양쯔강 사이에 자리잡아 徐夷로 대활약을 벌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고조선 시대라면..
한무제에게 동쪽으로 밀려나기 이전 고조선의 제후국인 예족이 요서 근처에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것입니다.
즉, 예족은 하은주시대, 춘추전국시대.. 전한에 밀려나기 이전에.. 중국지역으로 상당한 자기세력을 보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그 증거와 흔적이 서씨徐氏, 서이徐夷 서국徐國, 서주徐州에 남아있는것이죠.
이들이 예맥족의 예족인데..
예족이 이런 활약상을 보일 때,
맥족은 누구냐하면.. 고구려인을 보통 맥족이라 표현합니다.
후한지 동이열전에 고구려인의 기습을 맥인의 기습으로 표현하고 있거든요. 맥국이라는 표현도 있구요.
구려(句驪)는 일명(一名) 맥(貊)이라 부른다.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이에 [후한(後漢)은]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 [요동(遼東)]속국(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현(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궁(宮)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 원초(元初) 5년(A.D.118; 高句麗 太祖王 66)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포위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幽)]주(州)·[현도(玄菟)]군(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후한지 동이열전 '고구려'편
**여기서 고구려왕 궁(宮)은 바로 고구려 태조왕입니다.
수성은 그 다음 왕 차대왕의 이름입니다.
백고는 그 다음 왕 신대왕의 이름입니다.
고구려는 후한지 동이열전 '고구려'편에서
선비족, 예맥족, 마한족을 동원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중국을 휩쓸던 동이족은 '중국의 4이의 방향에 있는 지나족일뿐, 한민족이 아니다'~가 아니라..
바로 예맥족의 두 주축 중 하나인 예족들이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공교롭게도.. 서복은 서씨徐氏입니다. 즉 동이족으로 추정된다 이거죠.
중국에 다른 유래를 가진 서씨徐氏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안찾아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서주 출신의 서씨 徐氏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 진나라에서 탈출할 동기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진나라에 합병되어 흩어진 동포 아이들을 모아서
탈출한 집단 탈출국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진나라는 서주 하비지역(회수~사수) 사이의 서徐국인들을 사방팔방 흩어버리려 했으니까요.
서복은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이용해, 진시황의 환심을 사고, 동남동녀 선발권을 행사해..
동포들을 모은 후 탈출했다고 보면 어떨까요?
어쨌든, 그렇게 된다면.. 일본에 정착한 서복 일행은.. 徐夷의 중국 탈출기였고...
일본은 어쨌든 한민족의 후예들에게 개척당한 것일 가능성이 생깁니다..
일본은 철저히 한국인의 영향력을 부정하려 애쓰지만...
서이徐夷의 후예든, 삼한의 후예든.. 우리 예맥 민족이 개척한 상황이 되는것이죠..
참고로, 항우가 수도로 삼았던 초나라의 팽성이 바로 서주 지방입니다.
한고조 유방의 고향은 서주의 패현(현재 강소성 패현)인데.. 바로 팽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초나라 항우의 고향은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부 지역이라고 하는데 여긴 서주가 맞나 모르겠네요.
물론 군대를 일으키는 곳은 좀 더 아래쪽인 회계가 되지요.
추가사항..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박물지(博物誌)
요약:
1.고조선을 형성한 두 부족(예맥) 중 예족 군장 여수기의 후예가 서씨(徐氏)
2.중국 은나라때부터 주나라, 춘추전국시대까지 존재했던 서이徐夷, 서국徐國이 바로 예족의 후예.
훗날 서국은 서주徐州로 이어짐.(삼국지에 나오는 도겸, 유비, 여포의 서주가 바로 그곳..)
이 곳은 또한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인 패현이 있는 곳이며, 초나라 항우가 수도로 삼은 팽성이 위치.
3.진시황의 통일 후 흩어졌으나,
서복徐福이 동남동녀 3천과 장인 등 5천명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감..
성씨를 보아하니, 서이족의 후예로 진시황한테 사기치고 탈출극을 벌인게 아닌가 사료됨..
4.진나라의 부역을 피해, 초한전쟁과 한나라 초기 혼란상을 피해
탈출한 동이족들이 한반도에 자리잡은게 진한..(훗날의 신라)
5.마한, 변한, 진한은 이미 왜 열도와 일찌감치 철을 매개로 한 무역 중이었고,
왜인(문신)을 한 삼한인이나 왜인이 들락거림.
6.일본은 진나라 서복을 자신들의 조상인양 받들고, 한민족의 영향을 애써 축소하려는데..
실상은 서복도 동이족 출신으로 동족 아이들을 선발해 집단 탈출 사기극을 벌인게 아닌가 함..
결국 중국 쪽 한민족이나, 한반도 한민족의 수혜를 받기는 마찬가지..
7.고구려 태조왕은 선비족, 마한족, 예맥족 모두를 동원해가며, 한나라를 침공.. 이런 동원력의 배경에는..
고구려 태조왕의 카리스마 뿐 아니라,동족의식 같은 민족적 유대감이 있지 않은가 사료됨..
고구려가 마냥 힘으로 주변국을 제압하고 강제동원할 상태는 아닌 상태라고 보기에..
(태조왕도 계루부 고씨 왕으로써 소노부 해씨를 제압한 첫번째 왕이라.. 지배구조가 튼튼하다고 보긴 어려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