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근거
1) 612 년 수나라 육군의 침공 및 패퇴로 본 위치
A
요수 ㅣ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성
(서) ---------------------------------------------------> (동/동남)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동남)
※ 기록에는 수나라 패잔병들이 하루밤낮을 뛰어서 도망쳤다고 돼 있다 근 200km를 하루에 이동하는 게 가능한가?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기록
"가을 7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ㅡ 하루 밤낮을 450리 행군하는 게 말이 되는가?
ㅡ 청천강과 압록강 거리가 450리인가?
ㅡ 수나라 군대가 도망쳐 간 곳은 당시에 수나라 본진이 있던 요동성이다
ㅡ 즉 압록강과 요동성 (심양) 은 가까운 곳으로 봐야 하며 그 강은 혼하 상류, 청하, 태자하밖에는 없다
2) 645, 648 년 당 태종 침공으로 본 위치
C
안시성 ㅣ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서) -----------------------------------> (동/동남)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서) ---------------------------> (동/동남)
E
박작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ㅣ 패수
(북)------------------------------------->(남)
2. 신당서 가탐도리기
1) 육로
A
영주(營州) ~ 연군성(燕郡城)
거리 : 180리
방위 : 동
B
연군성~ 여라수착(汝羅守捉) ~ 요수(遼水) ~ 안동도호부(옛 한나라 양평성, 고구려 요동성, 현 심양 지역)
거리 : 500리
방위 : 동
C
영주 ~ 안동도호부
거리 : 680리
방위 : 동
D
안동도호부 ~ 평양성(平壤城)
거리 : 800리
방위 : 동남
E
안동도호부 ~ 건안성(建安城)
거리 : 300리
방위 : 서
F
안동도호부 ~ 압록강(鴨淥江) 북쪽 박작성(泊汋城)
거리 : 700리
방위 : 남
G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
ㅡ 안동도호부 (고구려 요동성, 현 심양지역) 동북쪽
2) 해로 : 산동 등주에서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이동
H
등주(登州) ~ 대사도(大謝島) ~ 구흠도(龜歆島) ~ 어도(淤島) ~ 오호도(烏湖島)
거리 : 3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I
오호해(烏湖海) ~ 마석산(馬石山)의 동쪽에 있는 도리진(都里鎮) ~ 동쪽 해연에 정박
거리 : 2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J
도리진 ~ 청니포(青泥浦) ~ 도화포(桃花浦) ~ 행화포(杏花浦) ~ 석인왕(石人汪) ~ 탁타만(橐駝灣) ~ 오골강(烏骨江) ~ 남쪽 해연에 정박
거리 : 800리
방향 :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
※ 도화포 : 현 금주 (진저우) 시 서남쪽 호로도시에 있었던 포구
※ 등주 ~ 오골강 : 총 1,300리
K
또한 오목도(烏牧島)와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의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長口鎮)에 도달한다.
※ 신라 서북쪽 장구진은 명나라 개주와 복주 사이에 있던 신라채 (신라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인은 추정하고 있다
※ 패강구(貝江口)는 패강 입구로, 이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요사지리지에도 요동에 패수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L
또한 진왕석교(秦王石橋)와 마전도(麻田島)와 고사도(古寺島)와 득물도(得物島)를 지나는 1000리를 항해하면 압록강(鴨淥江)의 당은포구(唐恩浦口)에 이른다.
※ 진왕석교 : 당태종이 건넌 요택의 물줄기 가운데 하나인 발착수와 관련한 유적으로 본인은 추정한다. 진왕은 당태종을 높여 부르는 별칭이므로 진왕석교는 당태종과 관련한 명칭이 분명하다
※ 오골강 ~ 압록강 당은포구 : 이 거리가 1,000리라는 말이 아닐 것으로 본인은 추정한다 1,000리의 거리에 비하여 중간 기점의 수가 매우 적다. 요택 지역인 오골강에서 해안을 따라 현 압록강에 도달하려면 1,000리보다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 따라서 본인은 이 1,000리를 도리진 ~ 압록강 당은포구 거리로 보고, 오골강 ~ 압록강 당은포구 거리를 200리라 해석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아래의 N과 M의 저항에 부딪힌다
M
압록강 당은포구 ~ 신라 경주
ㅡ 육로 동남 700리
※ 이 기록에서 압록강은 현 압록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나 그 거리를 보자면 700리로 너무 짧다
※ 당시의 거리척인 1리 = 500m를 적용하더라도 너무 짧다
※ 그러나 등주~요하의 해안 거리를 1,300리로 잡은 거리 감각으로 보자면 가능성은 있다 이 거리 감각은 상기 L 에도 적용할 수 있다
N
압록강(鴨渌江)의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는데 발해(渤海)의 경내이다. 또한 물길을 거슬러 500리를 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성(城)에 도달하는데 옛 고구려의 왕도(王都)이다.
ㅡ 여기에서 가탐도리기의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을 가리킨다는 증거가 작동한다
ㅡ 이 해로의 기록과 육로의 기록을 종합할 때에 육로 기록에서 안동도호부 (심양) ~ 평양 동남 800리에서 평양은 환인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 즉 가탐도리기에서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 평양은 환인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 이러한 이유는 압록이라는 명칭을 지닌 강이 두 곳이었거나 신라가 고구려의 요동지역을 차지하지 못 하면서 그 서북계 천참을 뜻하는 압록강이 본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압록강으로 명칭이 밀렸다 볼 수 있다
※ 또한 압록강의 이 경우와 비슷하게 '평양'이라는 지명 자체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고구려도 여러곳이었고 신라 영토 내에서도 삼한통일 전쟁 훨씬 이전과 그 후 고구려 수도로서의 평양을 차지하지 못한 후기신라에서도 평양 명칭은 여러곳 등장한다
※ 따라서 고구려 압록강, 평양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면 이 함정을 잘 피해야 할 것이다
3. 요사 & 요사 지리지
A
압록강
ㅡ 요양ㆍ심양 근처
ㅡ 무순ㆍ철령 근처
ㅡ 강동6주 근처
B
요ㆍ심 ㅣ 압록강 ㅣ 여진국
(서) ------------------------> (동)
C
요ㆍ심 ㅣ 압록강 ㅣ 강동6주(고려)
(서) ------------------------> (동)
D
강동 6주
ㅡ 헌 혼하 상류 및 청하 동쪽 ~ 장춘 이남
E
고구려 장수왕 평양 & 고구려 멸망기의 평양
ㅡ 동경요양부 관할 지역
※ 본인은 이 기록을 현 요양시가 아니라 동경요양부 관할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4. 독사방여기요
요동성ㅡ요양 북쪽 70~100 리
비사성ㅡ요양 서남쪽 120리
개모성ㅡ요양 서남쪽 240리
안시성은 개모성 동북쪽 70리, 요양 서남쪽 170여 리
오골성은 안시성 동남쪽, 바다와 가까움
오골성은 안시성에서 압록강과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건안성ㅡ개모성 동남쪽, 요동성 서남쪽 300리, 가탐 안동도호부 서쪽 300 리
평곽성ㅡ개모성 남쪽
남소성은 요양 남쪽 600리, 바다 북쪽 120리
신성은 남소성 서쪽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
요수ㅡ요양 서쪽 160리, 광녕위 동쪽 200리
요수는 현 요하
광녕위는 요양 서쪽 420리, 비사성 북서쪽 240리, 남소성 서북쪽 720리
광녕위는 현 금주(요하 서쪽, 조양 남쪽)시
남소성(금주)은 현 요동반도 진저우(金州)만
5. 삼국사기 지리지 & 고려사 지리지
ㅡ 고려사 지리지는 현 북한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이자 위만과 기자의 왕험성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ㅡ 고려가 현 평양을 개발한 것은 왕건 때부터로 이후 근 1백여 년 간 도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 시키고 계속하여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였다
ㅡ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평양을 차지한 기록이 전혀 없다
ㅡ 애초에 평양은 당나라 몫이고 신라는 패수 이남, 그러니까 평양 이남을 약속 받았을 뿐이다
ㅡ 뿐만 아니라 신라는 이 패수 이남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 했으며
ㅡ 당나라와 적대관계로 있다가 발해ㆍ당 전쟁에 참전하면서 당으로부터 다시금 패수(니하)이남의 땅을 재공인 받았을 뿐이다
ㅡ 그러나 물론 요동은 발해 차지였다
ㅡ 명나라 개주 남쪽 바닷가의 '신라채(신라새)'는 이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인은 추정하고 있다
ㅡ 따라서 패수와 고구려 수도로서의 멸망기 평양의 위치 역시 이 신라채 북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ㅡ 신라는 평양을 차지하지 못 했으므로 고려 왕건의 평양은 고구려 수도로서의 평양일 수가 없다
ㅡ 고려가 요동에 진출한 것은 발해 멸망 후 10세기 중반 광종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