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위세와 평양의 위치'에 붙이는 글입니다. 애초에 해당 글에 댓글로서 붙이고자 했으나 분량이 많고 근거보다는 심증이 앞섰기에 보다 더 숙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미루었습니다.
이 글은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학계 통설이 수의 고구려 대침공을 야기한 고구려 영양왕 9년, 서기 598 년의 요서 타격이 지금의 유성을 공격한 것이라 하는 것을 접하고 강한 의문을 품게 되면서 비롯하였습니다. 여러 수나라 지도에서 그 영역이 지금의 조양이 아니라 난하 서쪽에 그치게 표시함에도, 또 수나라 동북 영역이 수서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볼 때에 난하 서쪽, 혹은 영정하 근방으로 비정되는 유성현에서 끝남에도 학계 통설에서는 영양왕이 지금의 조양을 공격했으며, 그 조양이 수나라의 요서군 유성현이라고 주장하여 온 것입니다.
고찰은 댓글로 붙여 하겠습니다.
1. 동천왕(3세기) ~ 장수왕(5세기) 시기의 모용선비 및 중원계 세력과 고구려의 대결
# 기사 출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대왕 395년 기사는 광개토태왕비에서)
1)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2) 중천왕
12년(서기 259)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 고려 인종)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3) 서천왕
11년(서기 280) 양맥(서)과 숙신(동북)의 난 평정과 복속
4) 봉상왕
2년(서기 293) 가을 8월,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신성 태수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맞이하고, 적군과 만나 분발해 그들을 공격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났다.
5년(서기 296) 가을 8월, 모용외가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렀다. 임금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가 선정을 베풀어 권력과 명성이 높아지니, 모용외는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5)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서기 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20년(서기 319)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平州刺使) 최비(崔毖)가 도망쳐왔다. (그후 최비가 단씨, 우문씨, 고구려와 함께 연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가 하성(河城)을 막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임금이 동맹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곧 돌아갔다.
21년(서기 320) 겨울 12월,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 우리가 패하였다.
6) 고국원왕
5년(서기 335) 봄 정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9년(서기 339), 연(燕)나라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12년(서기 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15년(서기 345)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25년(서기 355) 봄 정월, 임금이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볼모와 공물을 바치면서 그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에게 왕의 어머니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임금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다.
40년(서기 370),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7) 고국양왕
2년(서기 385)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8) 광개토태왕
391 년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9년(서기 400) 봄 정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11년(서기 402),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13년(서기 404)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 <진서>에는 '연군(현 북경)'을 공격했다고 기술돼 있다.
14년(서기 405) 봄 정월,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15년(서기 406)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9) 장수왕
장수왕 15년(서기 427)
15년(서기 427),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장수왕 23년(서기 435)
23년(서기 435) 여름 6월,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장수왕 24년(서기 436)
24년(서기 436), 연나라왕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낭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2. 고구려 왕에게 선비족 및 중원계 국가에서 내린 직위
0) 고국원왕
ㅡ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연, 355 년, 모용준)
1) 광개토태왕
"모용보(慕容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ㅡ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2) 장수왕
ㅡ 고구려왕낙랑군공(高句麗王樂浪郡公) (진, 413 년)
ㅡ 진(晋) 안제(安帝) 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 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使持節 都督營州 諸軍事 征東將軍 高句驪王 樂浪公)으로 삼았다. (송서)
ㅡ 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璉에게 散騎常侍와 督平州 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송서)
ㅡ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35 년)
ㅡ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남제, 480 년)
ㅡ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91 년)
3) 문자명왕
ㅡ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령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북위, 492 년)
ㅡ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제, 494 년)
ㅡ 거기장군(車騎將軍) (제, 496 년)
ㅡ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양, 502 년)
ㅡ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북위, 519 년)
4) 안장왕
ㅡ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 (양, 520 년)
3.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중국 사서의 기록
1) 구당서(舊唐書)
“西北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에 이르렀다”
2) 원사(元史)
“서북으로 遼水를 지나 營州에 접하였다”
4. 상기 1~3에 대한 학계의 통설
1) 위치
ㅡ 연(燕) 숙군성(宿軍城) : 현 요녕성 醫巫閭山 동쪽
ㅡ 연(燕) 극성(棘城) : 현 요령성 부신시
ㅡ 연(燕) 용성(龍城) : 현 요령성 조양시
ㅡ ~ 수(隋) 요서군 유성현 : 현 요령성 조양시
2) 견해
ㅡ 영주(營州)는 북위ㆍ수ㆍ당 시대에 지금의 조양시에 있었다
ㅡ 요ㆍ금 시대에 하북성 창려현으로 옮겨갔다
ㅡ 광개토왕 12 년에 후연의 숙군성(현 의무려산 동쪽 비정)을 공략하고 이어 후연이 반격했으나 고구려가 효과적으로 반격하였으므로 이 시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지금의 요하 동쪽)을 실질적으로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수ㆍ당 시대까지 유지되었다고 보인다
ㅡ 도독이란 군사권을 장악한다는 의미로 역시 漢代에서 비롯되었는데 일정지역의 군사통수권을 위임받는 것을 의미하는 가호(加號)였다. 사지절도독영주제군사(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에 고련(高璉 장수왕)을 제수함은 곧 동진(東晋)이 高句麗의 長壽王에게 營州의 軍事的 統帥權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영주(학계 통설 지금의 조양)는 당시 북연의 영역이었으므로 실질이 아니라 형식적 직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ㅡ 그런데 한편으로 광개토대왕이 후연의 숙군성을 개척하고 장수왕이 북연의 지배층을 받아들인 사실 정황에서 지금의 조양 지역에 대하여 고구려가 영향력내지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3) 학계 통설 요약
ㅡ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말기부터 장수왕 시대에 의무려산 동쪽, 혹은 조양 근처까지 영향력을 미쳤거나 지배했고 그것이 수ㆍ당 대에까지 이어졌다
ㅡ 학계 통설에서는 고구려 최전성기의 서쪽 영역을 의무려산 동쪽에서 조양 근처까지로 보고 있으며 지도에도 요하의 서쪽을 살짝 지배하였다는 식으로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