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했을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조선에 서신을 보내 왔습죠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조선에 이러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거절했습죠. 조선의 태종도 왜구들을 빗대어 개같이 도적질을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이 있다라고 표현했습죠 그러기에 왜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래에 다시 침략해올 녀석들이 왜구놈들이니깐요. 절대 믿을만한 놈들이 아닙니다.
김희윤(金希允)이 다시 건주(建州)에 들어가 폐물(幣物)을 주니, 누르하치 형제가 잔치를 열고 환영하였다. 희윤 등이 조선에 대해서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르니, 누르하치 등이 모두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고 사죄하고 다시 조선과 우호를 위한 동맹을 맺자고 청하였다. 희윤이 ‘각자 자기의 국경만 지키면 되지 우호동맹을 맺을 필요는 없다.’ 하니,
-선조수정실록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자문에,
“이번에 여진(女眞의 건주(建州)에 사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이 하는 말에 의거하건대 ‘우리들의 땅은 조선과 경계가 서로 연접해 있는데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 노아합치(奴兒哈赤) 휘하에 원래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도독(都督)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위엄찬 화를 내어 정병을 뽑아 한겨울 강(江)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왜노를 정벌 살륙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이다.’ 했습니다. 이 고마운 말과 충의가 가상하여 그들 말대로 행하도록 윤허함으로써 왜적의 환란을 물리치고자 하나 단지 오랑캐들의 속사정은 헤아릴 수가 없고 속마음과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선뜻 준신하기 어렵습니다.”
여진은 강한 군사력으로 명나라보다 더 쉽게 왜놈들을 섬멸할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조선은 피해를 줄이고 국력과 문화재 등을 훨씬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명과 조선은 힘을 아낄 수 있고 여진은 세력이 줄어들었을 테니 정묘,병자호란 역시 겪지 않았겠죠
명군은 오히려 평양 탈환전투를 제외하고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조선군의 반격을 막고 왜군과 협상을 했죠
당시에는 의병+수군의 활동으로 왜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그로 인해 북방의 조선의 정예군과 명나라군의 연합작전을 통해 충분히 물리치고 초기에 끝내버릴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명나라의 방해로 왜군은 경상도 등지에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고 후방 세력의 지원으로 3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되어 장기전으로 들어갔죠
만약 명나라 대신 여진의 도움을 받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조선 혼자 싸웠으면 임진왜란은 더 빨리 끝났을 것이고 국력 손실과 국부 유출도 훨씬 적었을 겁니다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밀린 이유는 조총병때문이 아닌 걸로 압니다. 사르후 전투의 경우 명나라의 무리한 행군요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쉬지도 못하고 보급도 안되는 상태에서 모래폭풍까지 만나 조총수들 시야를 가려 패배한 걸로 압니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강홍립 부대가 전체 투항하였구요.
쌍령전투의 경우는 장수가 좀 바보같았던 걸로 아는데 지휘장수가 총알을 아끼지말고 빨리빨리 쏴야이기는 상황에다 총알이 남아도는 상태에서 총알을 아껴야산다며 계속 싸움도 않고 소극적인 대처를 하다 청의 기병에게 대패를 한 걸로 압니다.
후의 나선정벌에서 청나라군은 러시아군에 연달은 패배를 했지만 조선군의 조총수 참가가 있은 뒤로는 두번의 전투 모두 승리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었고 청나라군은 조선군의 사격실력과 낙후된 자신들의 기술을 멍하니 보고있었다고 하는군요.(사실 청나라도 조총수는 있었는데 조총수들 실력을 믿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청일전쟁이 있을 시기에도 청나라는 수레에 활을 가득실어가 전쟁 준비를 했다고 하구요.)
참고로 나선정벌때 쳐들어온 러시아군은 가장 악랄하고 야만한 전투민족으로 소문난 코사크족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기병중심의 조선의북부지역병력과 명나라에서 함께 지원온 북방계 기병에게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전투기록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신립만 보고 판단하시는 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신립의 경우 조총을 아예 염두해두고 있지 않았다는 점과 전투가 있었던 탄금대 역시 농지,습지가 대부분이었던 곳으로 기병대의 속도저하와 일본 조총수들이 사격하기도 좋았던 곳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전술의 오류라 그렇지 실제 일본군도 조선 정예기병대가 온다는 말에 패배할까봐 겁먹었을 뿐 아니라 신립이 다른 경로로 통해서 일본군을 쳤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거기다 일본군이 북부지방으로 올라오면서(추운 날씨탓도 있겠지만) 조선의 노련한 기병대에게 자주 패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예24기의 마상무예중 하나인 편곤도 임진왜란때 북방의 편곤기병이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이자 조선에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조총은 전술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생각보다 효율적인 무기는 아닙니다. 한번 쏘면 1분 남짓을 기다려야 하고 비가 오면 장전도 힘든데다 사거리는 활보다 짧구요. 일본이 조총병을 대량양성한 이유가 일본의 활이 조선의 활에 비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 그랬을 겁니다. 기병대는 다케다 신겐의 사무라이 기병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메이지 유신때까지 완전히 사라졌구요.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한수 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이라 말하였고
- 누르하치때는 조선을 멸하고 말고할게 없었어요.. 누르하치때는 한창 여진부족 통일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명나라가 주적이였기 때문에, 조선을 멸하네 마네하면서 조선을 건들여서 적만들기에는 불리한 형편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누르하치는 조선과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고 교역하면서 좋게좋게 지내는게 만주에 이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임.
그말을 했다면, 오히려 강경파인 청태종이 했던듯 싶고, 한수 이북은 조상이 태어난 땅이라고 운운했다면
그것은 본디, 건주여진 5부족중 가장 큰 세력이였던 오도리 부족(여기서 애신각라 집안이 나옴..)이
한때 함경도 회령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의 일로, 본디 함경도가 여러민족이 혼거하던 야인의 땅이였다는 점도 기억하세요.
나중에, 명나라가 건주위를 설치하면서 조선보다는 명나라 줄을 잡는게 더 큰 이득이라고 생각한
몽거테무르(누르하치의 6대조였나? 8대조였나? 하여든 직계 할배)가 북진해서 길림쪽으로 이주함.
누르하치의 고향은 흥경(만주어-허투알라)입니다.
2. 삼전도 항복 때는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하였다
- 고려의 후손은 고구려를 말하는거 같지만, 청나라가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도 고구려는 빠져있습니다.
뭐, 고구려의 말갈족 역사를 쓰려니, 자기들도 안습이라고 생각한 건지-.-;; 하여간, 대신 신라나 발해를 오히려 띄워줌.. 게다가, 청태종이 조선을 보고,, 같은 나라, 동족이란 말을 쓸 캐릭터인지가 의문스러움..;;;
오히려, 이분은 명과 조선이 같다고 생각했고, 만주는 몽골과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라면서 웹에 떠돌아다니는데,, 물론, 청태종이 여러차례 인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편지를 보내온건 맞지만, 그 내용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가끔식 칭기즈칸의 유언이라면서, 떠돌아다니는 것도 낭설이였고, 어느 소설가가 쓴 건게 실재로 칭기즈칸이 말했던양 떠돌아다녀서-.-;; 신빙성이 영...
3. 누르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내기도한다."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누르차히가 왜란때 조선의 간을 본건 사실이고, 조선은 오랑캐라며 거절했지요. 그건 역사적 팩트이고..
이것에 낚여서 왜 누르하치의 도움을 거절했냐며,, 선조를 까는 한국인들도 있는데..-.-;;
오랑캐 도움 받을까 보냐?라는 마음이 아예 없었던건 아니겠지만..
여기 붙고 저기 붙는 여진족의 과거사 때문이 더 적절하며, 선조는 여진족의 행보에 대해 꽤 연구했습니다이것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큰 도움이 되었구요.. 그러니까. 조선파병을 빌미로 여진족들이 무슨 요구를 해올지도 의문스러웠고(세상에 공짜 없지요..) 워낙, 야인들이라 파병을 빌미로, 약탈, 방화, 부녀자 강 간등..
조선땅에 이미 명군과 왜군과 조선군이 뒤섞여 싸우는데, 거기에 야인군까지 끼여들게하며 안그래도 막장판에 더 골치가 아파오기 때문이죠.. 하여간, 누르하치는 이때 남들이 다 싸울때, 혼자 힘을 기르고 있다가
후금을 세우게 되죠 ㅋㅋㅋ
저도 기억이 좀 가물한데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한게 4군 6진으로 인해 밀려간거나
건주여진 중 이만주에게 학살당하고 도망갔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말이죠.
둘 다 이유일 수도 있겠고.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하네요.
건주여진도 크게 세개로 분류됐고 자잘하게는 엄청 많은 부족이 있었는데
그 중 이만주가 누르하치의 조상을 살해해서 도망쳤다는 기억이 납니다.
이만주는 세종과 세조 시절에 조선군의 공격을 많이 받았고
남이 장군의 공격에 부자 모두 참살되죠.
누르하치와 조선은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참전하겠다는 말은 당시 통일전쟁 중인 건주여진은 힘이 미약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북방으로 명나라의 병력들이 이동하니까 타겟이 자신에게도 올까 염려해서
그런 면이 크고 만주족 자체가 여진, 한족, 몽고, 조선의 잡다한 민족의 결합체입니다.
건주여진이 금의 완안부족과 큰 연관이 없지만 민족간의 차이를 확실하게 말하자면
금나라도 세력을 키울 때는 발해인을 포섭하려고 한 집안이라고 우대했지만
훗날 세력이 커지자 발해인은 여진족이 아니라며 흩어놓고 차별했습니다.
조선을 장악하지 않은 것도 정확하게 따지면 만주족의 역량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도 힘에 부쳤습니다.
민족 숫자가 워낙 적어서 만주족들은 문관으로 뽑는 것을 자제하고 모두 군인으로 만들었는데
큰 위협이 안되는 조선까지 굳이 빼앗을 이유가 없습니다.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도 배후위협을 제거하고 당시 경제난이 심각했던 후금의 돌파구였습니다.
게다가 홍타이지(청태종)이 초반에는 권력이 위태로와서 전쟁으로 지지기반의 확보와
약탈로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는 의도가 강해서 발생한겁니다.
하도 티브도 그렇고 조총 때문에 진걸로 잘 못 알고 있는데 실상은 조선이 일본군보다 못한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화약무기 종류 성능은 오히려 조선이 압도햇죠 문제는 그넘에 반란이 두려워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전란시 절대 모여 있으면 안됩니다. 병력이 10만명이면 머합니까 그거 모이는데 한나절인데 반란이 두려워서 이리저리 흩어 놓고 그거 모으는데도 절차가 복잡했던걸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