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수성현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만리장성이 서북한까지 내려온 사태가 다 이 기록에서 비롯한다.
1. 진서 지리지
ㅡ 진서는 7세기 당나라에서 편찬한 사서로
ㅡ 서진(265년 ~ 316년)과 동진(317년 ~ 418년)의 역사와 지리 등을 정리한 것이다
A. 진서 평주 낙랑군(樂浪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2) 둔유현(屯有縣)
3) 혼미현(渾彌縣)
4) 수성현(遂城縣) :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5) 루방현(鏤方縣)
6) 사망현(駟望縣)
2. 태강 지리지
ㅡ 태강(太康)은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함녕(咸寧) 6년(280) 4월 남방의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통일 기념으로 제정한 연호로 서기 280~289년까지 사용하였으며
ㅡ 태강 지리지는 이 때에 편찬한 지리서로 알려져 있다
ㅡ 이 태강 지리지를 근거로 사기에 주석을 달면서 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다
B. 태강 지리지 인용 주석 내용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史記』, 「夏本紀」)
진서 지리지와 태강 지리지는 모두 진(晋)나라의 역사지리를 담고 있으되
ㅡ 태강 지리지는 서진의 역사지리 정보를
ㅡ 진서 지리지는 동진시기까지의 역사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진서 지리지는 7세기에 태강 지리지는 3세기 말 당시(추정)에 쓰여졌으므로 비록 사기색은에 주석으로서 그 내용이 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내용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진장성은 비교적 다루기 쉽다. 이 기록이 있는 진서 지리지 평주 기록에 낙랑군 등 여러 군현의 교치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한군현은 후한 말기에 후한의 통제력을 벗어냤으며
ㅡ 공손탁을 고쳐
ㅡ 위나라
ㅡ 장통, 왕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모용외에 의해 교치가 된다
ㅡ 이 때가 기록상 314 년 음력 4 월로 모용외에 의해 수습 (교치)된 요동과 낙랑의 인구는 겨우 1,000여 가, 5,0000 여 명 정도이다
ㅡ 이는 후한서 군국지에 기록된 인구수보다 어림잡아 1/100이며 장통이 애초에 거느리던 요동ㆍ낙랑의 인구의 1/30이다
ㅡ 요동ㆍ낙랑 등의 군현은 위에 의해 이미 그 전에 군국으로서 평주에 예속된 상황이었으니 이미 위나라 시절에 지금의 하북ㆍ요서 지역으로 교치가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ㅡ 즉 인구대비로 볼 때에 장통이 데리고 모용외에 귀속한 요동ㆍ낙랑은 위에 의해 교치되고 남은 인구 가운데에서도 극히 일부임을 역시 추정할 수 있다.
ㅡ 요동ㆍ낙랑 등의 군현은 북위에 의해 하북성 고죽국
지역인 평주의 영주 관할로 예속 됐다가 다시 6진의 난 시기에는 하북성 보정시 쪽으로 교치된다
다음은 태강 지리지가 문제인데
태강 연호를 딴 지리지라 하여서 태강 연간에 편찬됐으리라 보는 것은 무리다
만약 태강 지리지를 언제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면 제시를 해야 할 것이다
태강연호는 서진이 중원을 통일한 직후에 쓰기 시작한 연호로 그것을 기념하고 중원의 지리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편찬됐다고 하나 이러한 거대프로젝트가 몇 년 만에 성과물을 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ㅡ 요서군인 하북부터 요동ㆍ현도ㆍ낙랑까지는 후한 말기에 이미 통제력을 잃어서 여러 군호가 난립했고
ㅡ 공손씨가 오래 장악했으며
ㅡ 위가 공손씨를 대리시켜 통치했다고는 하나 정작 위는 지리서를 남기지 못 했고
ㅡ 모용외의 선비족이 들끓었으며
ㅡ 실제 이곳을 차지한 것은 후연, 북연 등의 선비족 국가였다
ㅡ 하남에 자리한 동진은 고사하고 서진조차 이 지역을 실제로 통치했다 볼 수 없다
ㅡ 또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의 해당 군현 인구가 장통의 차지하고 있던 인구, 또 진서 지리지 위서 지형지 등의 해당 정보의 인구수로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여 태강 지리지는 태강연간에 쓰여진 것이 아니며 요동ㆍ낙랑 등이 교치된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추가
ㅡ 진서 지리지 평주 기록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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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주(平州). 안(按): 우공(禹貢)에서 말하기를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漢)에서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아우르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그리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 2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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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주는 한(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다.
2. 후한 말에 공손도(公孫度)가 (이곳을 차지하고)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고 공손강ㆍ공손연 대에까지 세력을 키워나갔다
3. 위나라는 이곳(평주)에 (공손씨에 벼슬을 주고) 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양평(襄平)에 치소를 두고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삼았다.
4. 공손연은 개깝치다가 위나라와 고구려의 합동작전으로 238 년에 망한다.
5. 위나라는 공손연 처리 이후에 다시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를 양평에 치소를 두어 설치해 관리한다.
6. 후에 평주(平州)를 유주(幽州)와 합하였다고 적었는데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규모가 작아졌다는 것을 충분히 추정케 한다
7. 함녕(咸寧) 2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고 돼 있는데
함녕은 275년부터 280년까지 사용된 서진 무제의 연호이다. 280년부터가 문제의 태강연호이다. 그리고 이 기록우 3의 내용과 중복되는데
8. 이는 두 번의 교치 사실을 추정케 한다.
9.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라는 내용을 통해 기존의 요동ㆍ낙랑 등의 영역과 인구의 상실을 이를 대변한다
즉 태강지리지와 진서지리지는 다른 시기에 쓰여진 것이지만 같은 시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ㅡ 이미 태강 연호를 쓰기 전인 276 년에 교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