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혹은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 이 기사는 주체가 백제 되야하죠. 일본서기 중국 자료 베낀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중국 중심으로 기록와 신라 우상으로 만든거라서 100% 신뢰성이 없는거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고려 왕에 시집온 몽고의 공주들을 보면 몽고가 우리보다 힘이 약했기에 원의 공주들을 시집이란 명칭 하에 볼모로 보낸 것으로 봐야함. 고려시대에는 몽고가 우리에게 공주를 볼모로 보낼 만큼 우리에 비해 약한 나라였나??? 백제도 마찬가지...왕자를 보낸게 볼모? 원래 힘 약한 곳에서 강국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왕족을 보내달라거나 혼인을 요청하는 것인데...왜인들은 이를 자기 식의 볼모로로 왜곡 표현한 것에 불과함. 봉건제 개념에서 영주 자식을 볼모로 잡는 것의 연장선으로 사실에 대한 해석을 그럴듯하게 왜곡한 것임...일본서기 자체가 그런 성격...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질문을 올리신듯
왜에 가있던 백제왕자의 역할, 위신에 대해서는 백제 멸망시의 부여풍을 통해 어느정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부여풍이 왜의 병사를 데리고 백제를 구하러 왔죠.
백제와 왜 왕실은 친인척 관계였고, 백제 왕자들은 인질 이라기 보다는 현제로 치면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라일본부 같은 게 일본 학계에서도 안 우기고 뒤로 빼는 건
당시 일본의 문명 수준이나 국력으로 보기에 택도 안 되는 일이라 그런 겁니다.
히미꼬인가 무시긴가 임신한 상태로 돌로 거시기를 틀어막고 일본이 신라 정벌하고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네 어쩌네도 우스운 이야기죠. 당시 일본이래 봤자 쪼꼬만 소국이고, 사실에 기반한 기록이라 가정한다쳐도 어디 신라 군단위 하나 정도 해적질하고 거기 촌장 정도 되는 사람 가지고 신라왕이니 개소리 했다고 봐야 합리적이죠. 당시 일본에서 국가라는 단위인식이 고작 그 정도였으니까.
원래 고대사에서 왕족이나 귀족 인질 보내는 건 흔합니다
현대의 인질 개념은 아니고 외교 사절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 문명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구요 사례는 엄청 많아요
제일 유명한건 로마가 훈족에게 인질 보내면서 국교 돈독히 한 거
그리고 볼모 보냈을 때 보면 백제가 고구려한테 한창 털리던 때입니다
거의 피난 개념이에요
우연히 들어왔다가 이 질문을 보았습니다. 제가 답을 쓰는 것이 도움이 될지 저도 의문이지만 몇 자 적어봅니다.
우선 히미꼬는 생몰연대가 분명한 사람(148~247)으로 106년에 고령으로 사망한 수로왕과는 나이가 100살 이상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부녀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히미꼬는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약 10살 정도 되던 때 신라 아달라이사금의 대대적인 지방 정벌을 피해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봅니다. 포항의 영일만 이야기도 이때의 역사적 사건을 반영한 것입니다. 비미호가 바다를 건너 구주로 갈 무렵은 160년대인 성무시절로 추정됩니다. 나이는 대략 20세 무렵으로 성인이 된 직후입니다. 이때 구주는 신이민그룹의 등장으로 구이민그룹과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구이민그룹인 중애가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신이민그룹인 히미꼬를 왕비로 선택한 것은 두 집단간의 갈등을 치유하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정변이 발생하여 중애가 죽고 히미꼬가 왕권을 잡으면서 내란이 발생합니다. 히미꼬의 중요부분만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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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애 1년 (170년); 비미호 23살
중애 2년 (171년); 비미호 24살
중애 8년 (172년); 비미호 25살
중애 9년 (173년); 비미호 26살, 왜국에 정변 발생, 신라에 사신
<6년 내란>
신공 1년 (179년); 비미호 32살, 비미호 즉위, 응신이 죽은 403년 기록이 있음.
신공 2년 (180년); 비미호 33살, 응신을 장사지낸 404년 기록이 있음.
신공 3년 (181년); 비미호 34살, 응신의 아들이 태자가 된 405년 기록이 있음.
신공 4년 (182년); 비미호 35살,
신공 5년 (183년); 비미호 36살, 418년의 기록이 있음.
... *신공 13년까지가 응신의 왕후인 중희의 5세기 초 기록임.
광개토왕에 의하여 잔국(고구려에서 삼한소국체제를 이르는 말)이 토벌된 바로 다음 해인 397년의 아신왕의 응신조로의 전지태자 볼모기록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달까지 일치하는 기록입니다. 이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출현하는 최초의 왜국기록이기도 합니다. 즉 그 전에 백제는 왜국을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인데 이것은 정확한 기록입니다. 397년이 기내에 왜국이 건국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 이전에 왜국을 만났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한일 고대사를 이해하려면 목지국 진왕력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百濟란 해양국가이던 목지국의 국명이며 백제왕이란 진왕의 호칭이었습니다. 제가 왕력을 적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