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ㆍ축조시기
ㅡ 기원전 2 세기/적극적 추정 기원전 3세기
ㆍ사용시기
ㅡ 유물, 탄흔으로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후 3세기 초
ㆍ규모
ㅡ 성벽 높이 최하 9m~최고 15m 추정
ㅡ 성벽 기단부 너비 40m
ㅡ 해자 깊이 3m
ㅡ 해자 + 성벽 너비 근 100m
ㅡ 둘레 3.5~3.7km
ㅡ 면적 근 27 만 평(근 88만 제곱미터)
ㅡ 사용된 흙 근 150 만 톤 이상
ㅡ 동원된 인력 연인원 100 만 명 이상
그밖의 경기도 내 삼국시대 초기 백제 (추정) 토목 유적
ㆍ토성
ㅡ옥수동토성, 수성리토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삼성동토성 등
ㆍ산성
ㅡ금암산성, 암사리토성, 귀산토성, 남한산성, 검단산성, 이성산성 등
<낙랑토성>
ㅡ 일제식민사학과 한국사학계 주류는 평양 대동강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토성리 토성을 낙랑 토성이라 명명하고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라 주장
ㅡ 축조시기 기원전 2~1세기
ㅡ 규모 42만 제곱미터로 풍납토성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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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열전>
ㅡ 삼국지는 서진(西晉) 사람인 진수(陳壽,233~297)가 280~289년 사이에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에 관한 정사(正史)이다. 이 책은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이며, 각각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ㅡ 이 시기는 백제 고이왕 시기로 왕조국가로서 중앙집권체제를 완비한 시기
ㅡ 내용
http://naver.me/GdxG4X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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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강단주류사학계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다
3세기 말 동시대 기록이므로
"이것 봐라. 동시대 사관이 기록한 것인데 이것보다 정확한, 믿을 만한 1차 사료가 어디있겠는가?"라고
뻐길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3세기의 것으로
그 수백 년 후에 편찬된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 (기)보다 신뢰할 만한 사서임이 얼핏 틀림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한반도 상황을 전함에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하여 일제식민사학과 대한민국 강단주류사학은 삼국사기 초기불신론이라는 불가침 논리를 만들어 설파하여 왔다
그런데 보라
3세기 말 한반도 남부가
위로는 낙랑ㆍ대방을 두고는
가장 크다는 마한조차도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50 여개의 소국이 난립한 연맹국가였고
백제도 이들 소국 가운데에 하나였을 뿐이라고 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자가당착, 자승자박의 논리가 아닌가?
당시 한나라 수만 대군을 맞아 수 년을 항쟁하고, 또 전투에서 거듭 이겼던, 또 1년여를 수성하여 버틴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라는 낙랑토성의 규모가
풍납토성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지 않은가?
이미 기원전 3~2 세기부터 연인원 100 만 명이 동원돼 축성된 근 100 만 제곱미터의 거대 토성이
50 여개의 소국이 난립한 후진 사회인 한반도에 등장해 거기서 내리 수백 년을 사용했다는 게
위서 동이전을 토대로 한다면 아귀가 안 맞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