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거란의 요양(遼陽) 위치 추적
ㅡ 거란국지 4권(과 신오대사 진가인 열전)을 중심으로 ㅡ
#0
이 고찰은 지난 2월 냉형산 추적 당시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처음에는 발해 건주를 간과하여서 '요양동남쪽 1,200 리' 기록을 버리려 했었다.
0. 석진 출황제 석중귀와 그 황후인 이태후는 요 태종 야율덕광이 석진을 멸망시킨 후 석중귀를 부의후에 제수하여 황룡부에 가서 살게 함에 따라 동단국이 발해 각지의 반란에 따라 발해의 옛 터전을 잃고 요주 동평군으로 이치됨에 따라 현 장춘시 서남쪽 사평시 인근에 내려와 있던 것으로 판단되는 용주(요 태종이 설치, 연파의 반란 이후 폐지 됐다가 성종이 1020 년 장춘시 북쪽에 다시 설치함)로 옮겨 감
會同十一年。晉開運四年。是歲晉亡。
晉侯自幽州十餘里,過平州,沿途無供給,飢不得食,遣宮女、從官採木實、野蔬而食。又行七八日,至錦州,衛兵迫拜太祖畫像,不勝屈辱而呼曰:「薛超悞我,不令我死。」馮後求毒藥,欲與晉侯俱自死,不果。又行五六日,過海北州,至東丹王墓,遣延煦拜之。又行十餘日,渡遼水,至渤海國鐵州。又行七八日,過南海府,遂至黃龍府。<거란국지>
1. 야율아보기의 황후이자 요 태종의 어머니이자 요 세종의 할머니인 술율태후가 진후(석중귀)와 태후(이태후)를 모두 황룡부(용주) 서북쪽 1,500 리에 있는 회밀주(회주, 현 파림좌기 서남쪽 인근)로 옮겨 살게 함에 따라 그곳으로 가기 위해 요양을 지나서 200 리 쯤 가다가 술율태후가 요 세종에게 (조주, 현 파림좌기 서남쪽 인근) 위폐되자(갇히자) 다시 요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요 세종이 이들을 요양에서) 먹고 살게 함
先是,述律太后徙晉侯並後於懷密州,去黃龍府西北一千五百里。行過遼陽二百里,而述律太后為帝所囚,晉侯與後複得還於遼陽,稍有供給。<거란국지>
2. 영강왕(요 세종)이 석중귀와 이태후의 아들인 연후를 데리고 형(현 장가가시 동쪽, 난하, 조하, 백하의 발원지 일대)으로 납량피서를 갔다가 돌아오자 이 태후가 패주까지 마중을 나감. 태후가 영강왕에게 농사 짓고 목축할 땅을 주십사 간청하자 영강왕이 건주 한(아)성 옆의 땅을 떼어줌(건주에 살게 허락함). 태후와 영강왕, 연후가 (패주로부터) 10여 일 걸려 요양에 도착함
陘,北地,尤高涼,北人常以五月上陘避暑,八月下陘。至八月,帝下陘。太后自馳至霸州謁帝,求於漢兒城側賜地種牧以為生,許之。帝以太后自從,行十餘日,遣與延煦俱還遼陽。<거란국지>
3. 요양에서 동남쪽으로 1,200 리에 건주가 있는데 건주절도사 조연휘가 (건주에) 쉴 곳을 마련해주고 건주 수십 리 바깥에 이들이 먹고 살 수 있게 50여 경(1경=약 60만 평, 50여 경=약 3백만 평)의 땅을 얻어 이들에게 줌
己酉天祿二年。北漢乾佑二年。春二月,徙晉侯、太后於建州。中途安太妃卒,遺令晉侯:「焚骨為灰,南向揚之,庶幾遺魂得反中國也。」自遼陽東南行千二百里至建州[七],節度使趙延暉避正寢以館之。去建州數十里外,得地五十餘頃,侯遣從者耕以給食。頃之,太宗之子述律王遣騎取晉侯寵姬趙氏、聶氏而去。<거란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