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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30 16:38
[한국사] 한국의 기원, 삼한 한국 마한의 국내사료 묶음
 글쓴이 : 도배시러
조회 : 2,682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38년(기원전 20)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예방하였는데,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람은 바르게 되고 하늘은 온화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ㆍ낙랑ㆍ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게 저를 보내어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과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노하여 힘으로 핍박하시니, 
이는 어떤 의도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가까운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자 겨우 호공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들이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잡으려 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부른 것이다.

39년(기원전 19), 마한왕이 죽었다. 누군가가 임금을 설득하였다.
“서한(西韓)왕이 이전에 우리의 사신을 욕되게 했습니다. 지금 국상을 치르는 중이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다른 이의 재난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다.”
임금은 신하의 말에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10년(기원전 9) 가을 9월, 임금이 사냥을 나가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임금이 병사 2백 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근처에서 싸우게 
했으나, 우리 병사가 패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거하여 지키고 있었다. 
임금이 친히 정예 기병 1백 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가 구원하니, 적병이 보고 곧 물러갔다.-온조왕

18년(기원전 1)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돌아왔다.-온조왕

24년(서기 6) 가을 7월, 임금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니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여 말하였다.
“왕이 처음에 강을 건너왔을 때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내가 동북의 1백 리 땅을 내주어 
편하게 살게 하였다. 이는 왕을 후하게 대접한 것이니, 왕은 마땅히 보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을 크게 쌓고 
우리 땅을 침범하려 하는데,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부끄러워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온조왕

26년(서기 8)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1)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온조왕

27년(서기 9)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온조왕

34년(서기 16)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목을 매어 xx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죽였다.-온조왕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  유리왕 [琉璃王] 

5년(서기 61)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쳐 항복하였다. -석탈해

(서기 121)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임금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 태조대왕 [太祖大王]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
[김부식-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 태조대왕 [太祖大王]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수(隋)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 태종(太宗) 황제께서 친히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하늘의 징벌을 집행하니, 
고구려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므로 문황제(당 태종)께서 항복을 받아주시고 되돌아갔습니다.
新羅 崔致遠曰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열전 [崔致遠]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왕인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좌우의 측근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한 [馬韓]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원안은 일찍이 원광의 일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신라의 왕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원광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청하여서 
별성(別省)에 있게 하였다. 매일 밤 두 시간씩 심오한 법을 말하고 계를 받게 하여 참회하게 하였더니 
왕이 원광을 크게 신봉하였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란하고 태양처럼 
생긴 것이 그의 몸을 따라다녔다. 왕후와 궁녀들도 모두 함께 이것을 보았다. 이 일로 인해 더욱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에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드디어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과 마한 사이에서 불법을 널리 펼쳤고 해마다 두 차례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시주 받은 재물은 모두 절의 경비로 사용하였으니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뿐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4권 [圓光西學]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 정 리 ********

신라 원광법사가 당나라 유학후 돌아온 시기는 30세, 서기600년 입니다.
마한과 진한 사이에서 불법을 전하셨다 합니다.
대가야 멸망 562년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마한이 고구려의 현도성 공략에 2회 참여 합니다.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마한이 현도성까지 2회 연속으로 갈수있었을까요 ?

서기9년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멸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한 54개국인지는 모릅니다.
후대에 백제를 포함하여 마한 54개국인것으로볼때, 그중에 일국을 멸한것으로 보입니다.
서진시대에는 마한 56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돌발 퀴즈
서기 121년 고구려 태조대왕께서...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는 기록이 있는데 갑자기...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고 합니다.

그럴거면 태조대왕이 부여에 와서 태후묘에 제사 지낼때 떼려잡지... 어떤 경우일까요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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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라스 17-09-30 18:42
   
낙랑은 최소 평양이나 두만강, 대동강, 혹은 요동에 있던 나라 아닙니까?
어찌 낙랑이 진한의 북쪽을 칠 수가 있나요? 옥저와 동예를 건너야 할 것을?
     
도배시러 17-09-30 22:47
   
낙랑의 위치와 무관하게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낙랑의 위치가 진한의 남쪽이면 쉽고요.
위서동이전에 진한을 소개할때 가장 끝에 위치한 소국이 사로국(신라), 우유국 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지명과 가장 먼 지명을 나열한다고할때... 가장 늦게 호명되는 소국이 멀죠.

낙랑이 사로국까지 밀고오는 동안 진한 12소국의 간격이 얼마나 널널 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진한 소국 간에도 전투가 간혹 있었으니... 군사이동을 살피는 보초는 있었을거구요.
낙랑이 북에서 최대 10개의 소국을 거치면서 사로국까지 오게 됩니다.
그리고 공격후에는 퇴로를 차단하는 소국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야만 사로국까지 남하가 가능하죠.
어렵겠죠 ?

기존 진한 공동체에 속한 다른 소국의 역사를 덮어쓴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봅니다.
진한의 북쪽 소국으로는 기저국, 불사국, 근기국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진한 12국 동이전의 기록 순서대로....
기저국(己柢國)·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여담국(如湛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馬延國·
사로국(斯盧國)·우유국(優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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