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고조선의 국가체는 어디 까지 발전 하였을까?
환뽕과는 거리가 먼글입니다.
고조선 자체가 기원전시대 국가라 의심하는 사람도 여러 있습니다.
과연 고도화된 국가의 체재를 갖추고 있었나?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과
반대로 고도화된 체재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도 설명드리고 싶었습니다..
일단 사서의 의거해서 살펴보면 고조선의 관직에 대해서 알아볼수가 있습니다.
위만의 왕조교체 이전에도 대부(大夫)예(대부가 관직이고 예가 이름입니다) , 박사(博士) 위만등이 있었으며, 위만 이후에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 , 조선상 노인, 상 한음 , 니계상 참 , 장군 왕겹 , 비왕 장 등이 있었습니다.
관직이야 말로 국가의 발달 정도를 확인할수 있는 정말 중요한 척도입니다.
먼저 기원전4세기의 고조선을 바라보겠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이 되면 정가자와라는 세력이 요동을 고고학적으로 통일시킵니다.
당시 고조선의 왕은(이름은 모름;;) 전국7웅중 하나인 연나라와 전쟁을 불사할정도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대부예가 고조선의 왕에게 간언하여 중재하게 됩니다.
대부예는 여기에서 직접 연나라까지 찾아가 화친을 성립시켰습니다 (위략)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고조선에는 대부예라는 관직이 존재 합니다.
고도화 되진 않았지만 어느정도의 관료조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즉,고조선이 초창기의 국가 조직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흘러 대략 기원전 3~2세기의 고조선입니다.
고조선 준왕 시기에 고조선의 관직은 박사만이 확인이 된다고합니다.
물론 기록되지 않은 다른 관직도 있었겠죠. 하지만 기록에서는 박사만이 확인됩니다.
<위략>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였으며 규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박사라는 관직은 중국의 진나라에서 처음 설치된 관직입니다.
여기서 해석하기는 실제로 고조선에 박사라는 관직이 있었거나
아니면 당시 중국인의 관점에서 위만이라는 인물이 박사라는 관직의 역할로 보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노태돈 교수는 박사위만이 고조선왕에게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라 해석하였습니다.
상(相)을 통해 바라본 우거왕대의 고조선
고조선 준왕대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평안도지역에 주를 이루었다면
우거왕대에는 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 북부를 포괄하게 됩니다.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선 지방을 통치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로서 준왕대보다 더 진일보한 지방통치의 모습이 발견됩니다.
여기서 상(相)이라는 관직은 중국의 " 승상 " 이란 비슷한 직책입니다.
고조선의 기록에는 조선상 역계경 , 조선상 노인 , 조선상 한음 , 니계상 참 등 여러 " 상 " 의 관직을 가진 인물들이 발견됩니다.
< 위략 >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가였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거주한 사람이 2천여호나 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역계경이라는 사람의 직위는 " 상 " 입니다.
그런데 우거왕과의 갈등으로 수하에 있던 2천여호를 끌고
고조선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되어 " 상 " 이라는 직책은 관료적인 직책보다는
특정 지역의 수장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과거 준왕대와 우거왕대의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준왕대의 박사위만은 패수 일대를 경영하며 그곳에 정착한것으로 보이는데
우거왕대가 되면 " 상 " 들은 상당한 자치력 세력을 보유함에도
왕에게 들어가 중앙에서 국정을 이끌고 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왕 "과 " 상 " 들은 조정에서 나름의 회의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였고
이는 훗날의 고구려가 각 부의 수장들이 상당한 자치력을 보유하면서도
임금과 함께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 가는 " 부체재 " 와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고구려 부체재는 5부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완벽하게 묶였다면
고조선 우거왕 대의 " 상 " 들은 왕과 갈등이 생기면
조선상 역계경 처럼 이탈해버리는 경우도 존재하였습니다.
일단 왕은 고조선의 넓은 영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하기에는 힘들어보였고
그래서 "상" 이라는 존재에게 일정의 권역의 통치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왕검성의 중앙 회의체에 참석하여 국정을 운영하여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상 역계경과 같은 상황을 보아
아직 완벽하게 정착하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초기형태의 부체재를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행정력과 군사력은 어디까지 발전하였나?
위에 말씀드렸듯이 고조선이 아직 정치체가 고도로 발전된 국가까지는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이 체재로도 전란시에 상당한 숫자의 군사를 소집하여 전투에 응합니다.
< 사기 > 에 보이는 기록만으로도 고조선의 왕검성에만 무려 1만명 이상의 병사 운용모습이 보입니다.
조선의 태자가 왕검성에서 출병하여 패수로 데리고 간 병사가 1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정도라면 고조선은 전시상황에서 대략 3만명 정도의 병사를 운용할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줄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는 3세기 무렵의 고구려가 전시에 2만명을 동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입니다.
이 정도의 군사력을 확보한다는것은
고조선이 기원전 3~2세기 무렵 확실히 고대국가로서의 반열에 진입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와의 전쟁(수륙양용 5만7천명) 고조선의 왕검성에서 한나라의 수군 7천명을 박살냈고
패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전보가 있었으며
왕검성이 함락된것도 한나라의 공격보다는 내분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외교능력
고조선은 한나라,흉노와도 외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한무제의 중앙 조정과도 직접적인 외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듯이 기원전4세기 경에도 연나라의 조정에
대부예를 파견하여 화친을 성립 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설명드리자면
고조선은 기원전4세기 경에는 걸음마 단계의 국가 조직이 성립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기원전 2세기쯤되면 고대국가로서의 초기형태라 부를 수 있을정도로 행정력과 군사력 지방통치제도 등이 성립되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고조선은 한나라의 전쟁에서 멸망하고 맙니다.
북만주 일대의 " 부여 "를 제외하면 고조선 정도로 국가체가 등장하는것은
150~200년 뒤의 고구려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고조선의 멸망은 분명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어느정도 늦추게 되는 안타까운 멸망이였다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고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해서 더 알아야하고 자부심을 가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