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비밀 협정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믿을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1904년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함대가 충돌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2월 23일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해서 한국 정부를 위협하는 가운데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자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고, 중요한 국무에 관한 일본의 간섭권을 승인하였으며, 일본은 러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한반도에서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태프트는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필리핀으로 가던 도중에 일본에 들러 밀약을 체결하였다. 밀약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출발 전에 루스벨트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밀약의 내용을 미국 국무부에 전문으로 보낸 후 필리핀으로 떠났다. 루스벨트는 7월 31일 필리핀에 있는 태프트에게 밀약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고, 태프트는 8월 7일 루스벨트가 밀약을 확인하였다는 내용의 전문을 가쓰라에게 보냈다. 이로써 양국 정상에 의해 밀약이 체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밀약은 1924년에 가서야 공개된다.
태프트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년 대통령 재임)의 측근으로, 1901년부터 1904년까지 필리핀 민정총독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태프트와 가쓰라는 비밀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각서로 작성하고 비공개로 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이라고 한다.
먼저, 정확히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밀약’은 정식 외교용어가 아니다. 밀약이라는 외교 용어가 있을 리가 없다. 본래 문건의 명칭은 “Agreed Memorandum”이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secretary of war)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와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桂 太郞)사이의 회담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합의각서, 비망록(備忘錄) 정도로 보는 것이 맞는 문건을 왜 밀약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이 문건을 발견해 낸 것은, 미국의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다. 데넷은 1924년 미 의회도서관에서 태프트-가츠라간 비망록 전문(電文)을 발견하고, 이를 소재로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밀약은 이 논문의 ‘secret pact’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루즈벨트의 밀약’이라면 모를까 ‘카츠라-태프트 밀약’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더 엄밀히 말하면 대화의 내용은 당사자를 법적으로 구속하는 약속이 아니므로 pact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밀약이건 비망록이건,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일본은 회담을 통해 상대국의 입장이 자국의 이익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그 확인을 바탕으로 각자 행동하면 되었다. 법적으로 구속하는 약속도, 지루한 교섭도 필요 없었다.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가츠라-태프트 회담의 본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회담의 추진 경위와 내용이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철저하게 일본이 기획한 것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전쟁의 종결 과정과 향후 극동(동북아시아) 질서에 미국을 깊숙이 개입시키고자 했다. 구상의 핵심은 영•미•일이 사실상의 동맹(de facto alliance)을 맺어 러시아를 역내 질서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영•일 간에 의견일치가 있었다. 카츠라-태프트 회담이 벌어질 당시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 외상은 영일동맹 개정을 위해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츠라-태프트 회담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영•일간 공조외교의 일환이었다.
<밀약은 세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태프트는 일본이 필리핀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필리핀이 다른 유럽 국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미국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일본에 유익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가쓰라는 태프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일본이 필리핀을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2) 가쓰라는, 미국이 어떤 외국과도 공식적인 동맹에 가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미국, 영국 사이에 실질적인 양해나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태프트는, 상원의 동의 없이 비밀 비공식 협정과 마찬가지인 양해에 미국 대통령이 가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국은 일본, 영국과 협력해서 조약상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밀약이 공식협정에 준해서 지켜질 것이라고 미국이 보증한 것이다.
3) 가쓰라는 한국이 국제적 분규의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동아시아에서의 전쟁 방지를 위해 한국에 대한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도록 요구할 정도까지 일본이 한국에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며,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같은 의견일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미국은 전통적 고립주의 방침에 따라 타국과 명시적 공수동맹을 맺는 것을 극력 피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모두 황제를 두고 있는 제국(帝國)이었고, 양쪽 모두 경계의 대상이었다. 미국 국무성에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차르’가 지배하는 러시아보다 일본에 더 호감을 갖고 있었다.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외교적 노력으로 얻어낸 외교 자산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그 틈을 노렸다. 가츠라는 회담을 철저히 비밀에 붙일 것을 태프트에게 요구하고, 집요하게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심지어 당시 주일전권공사이던 그리스콤(Lloyd Griscom)에게도 비밀로 할 것을 태프트에게 요구했다. 법관 출신의 태프트는 아무런 권한의 위임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부담스런 주제가 제기되는데 대해 찜찜해 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일 뿐임을 전제하고 대화에 임했다.
대화의 핵심은 극동에서 영•미•일간의 협조체계 구축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었다.
일본은 삼국이 극동에서 공동의 이익을 향유하며, 명시적 동맹은 불가하더라도 실질적 동맹(alliance in practice)은 가능한 것이 아닌지 묻는다.
태프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상원의 동의 없이, 명시적이건 비밀이건, 동맹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다만 미국은 극동의 평화 유지에 대한 일본과 영국의 정책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 정부는 필요시 적절한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것이 회담의 본질이었다. 필리핀과 조선 문제는 그러한 양해를 도출하기 위한 부수적 사안에 불과했다.
이 문건을 발견한, 타일러 데닛도 회담에서 필리핀과 조선이 상호 대상물(quid pro quo)로 교환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데닛 교수가 ‘밀약(secret pac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실질적으로 동맹 체결에 해당하는 언질을 의회와 협의 없이 타국에 전한 것은 행정명령(executive order)으로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행정부의 월권에 해당하는 것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즉, 미국의 국내적 권력 분립,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밀약‘이란 자극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지,
미•일간 조선과 필리핀 교환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데닛은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미국이 일본의 외교에 농락당한 것(outstepped) 이라고 분석한다.
다시말해, 침묵을 원하는 태프트의 의견을 집요하게 얻어내, 그를 일본의 국내정치와 외교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고쿠민(國民)신문은 10월 4일자 사설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free hand)을 인정했으며, 미국은 영•일동맹의 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극비를 요청해 놓고 먼저 정보를 슬금슬금 흘리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언론 플레이였고, 해석도 일본의 아전인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