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halmi/22117356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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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조실록은 해당 부분에 아예 병력 숫자 없음.
나중에 1596년 1월 비변사에서 하삼도 방비책을 건의하는 기사에서 10만설이 나오는데...
이는 본문이 아니라 주석으로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며 통탄한다고(通哉) 적고 있음. 단순한 수식으로 봐야 함.
2) 선조수정실록에는 신립이 떠날 때 류성룡에게 8천명을 받아서 서울에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 밖에 없음.
3) 정작 신립한테 병력을 줬다는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얼마 못 데리고 가서, 현지에서 모았다고 했음.
임진왜란 당시 전시수상을 했고, 신립에게 약간의 병력을 넘겨줬던 당사자인 유성룡의 말이 신빙성 있음.
4) 난중잡록은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라고 적혀 있음.
5) 코니시일행기(小西一行記)에는 신립이 한양에서 이끌고 온 37,500명에, 충청도에서 먼저 모은 12,500명이라고 되어 있음(총 5만명).
그런데 이 책은 코니시 유키나가를 주인공으로 한 군기물(군담소설)임.
군기물을 역사책으로 취급하면 안됨.
이미 이 문헌도 김시덕 교수가 연구를 했음.
6) 태합기에 '군세 6,7만(軍勢六七万)'이라고 적혀 있지만, 태합기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이 아니라, 사료를 취합해서 이야기꺼리로 만든 것(브리태니커 재팬 표현으로는 '준 군기물')임.
그러다보니 조선군이 농성하는 걸로 나옴. 그것도 믿을래?
7) 그리고 8만명이라고 써놓은게 프로이스 일본사.
앞서 말한대로, 자기가 직접 본 게 아니라, 건너 건너 들은 것임.
8) 임진전란사(이형석), 임진왜란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등, 정상적인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8~9천명이라고 명시하고 있음. 학자들은 바보가 아님.
(당장 네이버에 탄금대전투라고 검색해서 각종 백과사전 살펴보면, 전부 8~9천명)
신립이 당장에 5만~10만을 모으고 내려갈 수 있을 정도라면, 왜군이 어떻게 조선팔도를 유린할 수 있나?
그 정도 많은 병력이 죽었다면, 조선의 벼슬아치들도 그만큼 죽어서, '탄금대에서 죽음'이라는 프로필을 가진 인물들이 엄청나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
써져 있는 대로 믿을거 같으면 왜 실록의 8천명은 왜 안 믿고, 징비록은 왜 안 믿나?
사료는 교차검증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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