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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6 21:44
[한국사] 만주국 과 간도청 설치운동(한국민 자치령 수립운동)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461  

1) 사라진 독립운동 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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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한인 38만 명, 만주국 수립으로 정체성 혼란
 
만주국 수립은 재만(在滿) 한인들의 처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당장 국적 문제가 발생했다. 법적으로 일본 국민인지, 만주국 국민인지 모호해졌다. 간도(間島)를 한인들의 강역으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는 식민지 한인들은 만주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주국 수립 다음 달인 1932년 4월 27일 언론인 김경재(金璟載)는 서울역(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향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 간도 현황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주국 수립 이후 자신들의 상황을 국내에 소개해 달라는 간도 한인들의 요청도 있었다.
 
김경재가 두만강 북쪽 간도에 도착한 것은 나흘 후인 31일이었다. 김경재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를 역임한 민족주의자였지만 이후 사회주의로 전향했다가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2년6개월형을 선고 받고 1929년 8월 출옥한 터였다.

만주국을 바라보는 김경재의 심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만주 장악은 큰 충격이었다. 가장 곤란해진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일제가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독립운동 근거지가 사라졌다.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유격대에 가담하거나 중국 대륙으로 퇴각하거나 만주국의 치안숙정 공작에 따라 전향해야 했다.
 
중국 내륙 퇴각도 쉽지 않았다.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던 아나키스트 정화암은 “감시망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동지들이 한데 뭉쳐서 나올 수도 없었고 걷다가는 쉬고, 기차를 탔다가는 다시 자동차를 타고 하는 고역을 겪으면서 쫓겨야 했다 라고 회상했다.
 
동북행정위원장 장경혜는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독립운동가들은 퇴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그저 몸으로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경재는 <삼천리> 1932년 5월 15일자에 <동란(動亂)의 간도(間島)에서>라는 기행문을 실었는데 “간도(間島)는 조선인의 간도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김경재는 “윤관(尹瓘)이 16만의 대병(大兵)을 이끌고 가서 두만강 이북 700여 리를 개척하는 동시에 선춘령상(先春嶺上)에 석비(石碑)를 세우고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서 국경을 명확히 했다고 하는 바 그곳은 지금의 북만주 영안현(寧安縣)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한국 주류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에 따라 고려의 동북쪽 강역을 함경남도 흥남 지역까지로 축소하고 있지만 김경재처럼 대일 항쟁기 때 지식인들은 북만주 영안현까지를 고려 국경으로 보았다.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의) 동북쪽 강역은 곧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東北則以先春嶺爲界)”라고 말하고 있고, <태종·세종실록>에서 이를 거듭 확인하고 있는데,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다 
 
2) 일본·중국·한국·만주·몽골 五族協和 주창

대한제국은 1903년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면서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키고 간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납부 받았다. 그러나 일제가 1909년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는 대신 동청철도 부설권을 넘겨 받는 간도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는 바람에 중국령으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만주 전역을 장악했으니 간도 한인들의 관심이 비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경재는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에 갈 때는 이것이 외국이구나 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철도 연선(沿線)의 어디를 보나 조선의 집이요 농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경재는 ‘간도의 조선인은 38만1000여 명이지만 중국인은 11만6000여 명이고 일본인은 2000여 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김경재는 그러나 “다만 토지소유지례(土地所有地例)에 있어서 중국인의 소유가 조선인 소유의 배가 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간도 전원의 높다란 담장에 사위(四圍)에는 포대를 축조한 중국인 토호의 집이 있고 그 부근에는 게딱지 같은 동포의 농가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본다”면서 “이런 역사와 현실은 간도는 조선 사람의 간도라고 부르짖게 되었고 또 그것이 그곳 동포의 심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걸었다. 오족(五族)이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만주인, 몽골인을 뜻한다. 

관동군 전략가였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국을 미국과 맞붙게 될 ‘세계최종전쟁’의 기지로 삼았다. 그로서는 만주국이 새로운 이상 국가 건설의 실험장이었다. 군사 침략이란 패도(覇道)를 택했으면서도 왕도(王道)를 내건 자기모순이 만주국의 복잡한 성격을 말해준다.

중국인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한인 농민들로서는 일본이 실권을 장악한 만주국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이 무렵 재만 한인들이 조직한 민주단(民主團)이란 단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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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단 상무이사 전성호(全盛鎬)는 김경재에게 자신들을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용정(龍井)시내에서 대성학교, 동흥학교 같은 민족주의 학교들과 대립되고 있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적지않은 논란을 낳은 단체였다.

3)조선인만의 간도청 설치운동 

그런데 이 민주단 관계자가 중추가 되어 주창한 것이 간도청(間島廳) 설치 운동이었다. 간도청 설치 운동은 

1. 간도를 만주국 내의 특별 행정구로 설치해 달라 
2. 간도청의 임직원은 간도에 거주하는 민족의 비례수에 따라 임명해 달라 
3. 간도청의 장관은 일반의 공청에 의해 달라’는 등의 세 가지 요구였다. 

이에 대해 김경재 같은 사회주의자도 “간도 자치구 설정에 대한 이론과 시비는 별문제로 하고 간도는 조선인의 간도라는 것이 간도에 거주하는 동포 전체의 의사이자 욕구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식민지 치하의 재만 한인들은 만주국에 지분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관동군이 육군 중앙의 방침에 따라 새로운 국가 건설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력자들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와 양립할 수 없었고 만주사변 이후 거의 궤멸되었다. 이 점이 만주 한인들의 딜레마였다.


[출처] 만주국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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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5-06 23:24
   
알아서 무너질 청이었는데 왜놈들 때문에 간도도 넘어가고...아쉽네요
버섹 18-05-07 03:55
   
우리가 분단된 것도 왜놈들 때문이죠...
그 놈들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려고 시도해 왔는데...
임진왜란 때의 할지론...
러일전쟁 직후의 39도선 분할시도...
그랬던 놈들이 2차대전 패망직전에 러시아를 끌어들여 38도선 북쪽을 차지하게 만들어 결국은 분단을 시키고야 말았죠...
정말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네요...
     
촐라롱콘 18-05-07 08:48
   
[[러일전쟁 직후의 39도선 분할시도... ....???
그랬던 놈들이 2차대전 패망직전에 러시아를 끌어들여 38도선 북쪽을 차지하게 만들어 결국은 분단을 시키고야 말았죠...]]........???
.
.
.
러일전쟁 직후라면 미국의 중재로 러일간에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서
어짜피 일본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독점적인 권익을 인정받았는데
일본이 미쳤다고 39도선을 경계로 하여 러시아에게 대략 평안도-함경도지역을 떼줍니까...??

그리고 러일전쟁 이전이라도 39도선 분할론을 주로 제기한 쪽은 러시아였습니다.
러일전쟁 이전의 일본의 구상은 한반도는 일본에게, 만주는 러시아에게 우선적인 권익을
인정하자는 구상이었구요! 이에 러시아가 좀 더 욕심을 내어 39도선 이북에 해당하는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러시아세력권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2차대전 말기에 일본이 미국에 쳐받는것도 감당하기 힘든 판국에...
뭐하러 일본이 스스로 결정적인 패망을 자처하는 소련(러시아)를 끌어드립니까....???

당시 일본은 소련과 중립관계에 있었고... 하필이면 전쟁이 거의 끌나가는 1945년 5월이
그전에 일-소간에 맺은 중립조약 유지기한 마감일인지라.. 일본은 필사적으로 일-소 중립조약
의 연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요....???

하지만 이미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을 통해 유럽에서의 전쟁이 마감되고 만 3개월이 되는
시점에 소련은 병력을 극동으로 이동시켜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이미 소련이 연합국들과
합의한 이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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