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우리나라의 관디[冠帶]와 의복, 신발은 바로 주공(周公)이 남긴 제도이며 명 나라 황제가 반사(頒賜)하신 바로서 열성께서 지금까지 준수해 오고 있는 것이니, 천하 만국이 우리나라를 예의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도 그 이유가 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故) 상신(相臣) 박규수(朴珪壽)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와룡관(臥龍冠)을 쓴 채 조사(朝士)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선왕의 법복이다.’ 하고는 그 옷을 벗기를 청하여 그 집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조선만이 주공이 제정한 예를 보존한 나머지 의관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그 후 사명을 받들고 들어간 자가 있으면 매번 그랬다고 합니다. 작년 봄에 중국 사람이 동학(東學)에 들어가 우리의 의관을 어루만지며 울먹이기를, ‘200년 전 사람들과 같으며, 역시 명 나라의 유민(遺民)이다.’ 하였으니, 옛것에 감동하고 우리의 의리를 사모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아, 명 나라의 남은 빛이 유독 우리 청구(靑邱) 한쪽 구석에 비치고 있으니, 한 가닥 유제(遺制)의 의관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 자신에 이르러서 변경한다면 참으로 성인의 제도를 지키고 명 나라에 보답하는 의리가 아니며, 또 조종에서 지켜 오던 의례를 이어받는 도리도 아니어서, 신은 천추 만세에 전하를 비평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고종 21년 6월 8일 남원 유생 이흥우가 복식 개혁에 반대하며 올린 상소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