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청사가 한국사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들의 역사를 먼저 바로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것이 너무나 잘 못됀 것이 많아서 씁니다.
만주의 대부분은 중국영토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의 만주는 중국과 러시아가 찢어나눠점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땅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그럼 만주의 역사가 러시아역사의 일부도 됩니까? 금나라 청나라가 러시아 역사도 됍니까?중국인이 된 만주족들은 더이상 만주족이 아닙니다. 중국인일 뿐입니다. 미국인이된 멕시칸들의 수는 그보다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멕시코역사가 미국역사의 일부가 됩니까? 여진족은 우리민족에 융화된 민족이 아니라 우리민족에서 갈라진 민족입니다. 여진족이라는 것은 신라의 김함보이전엔 존재하지도 않던 민족입니다. 최초의 여진인은 김함보의 아들이고, 여진이라는 민족은 신라인 김함보일파와 말갈 발해족이 섞이면서 형성됐습니다. 그리고 말갈족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인이었고 또 고조선인이었습니다. 마지 중국의 소수민족처럼 여진족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진족은 한민족과 다른 소수민족이 아니라 과거 한민족이 갈라진 민족입니다. 만주족이 정통성에 대한 뿌리가 약해져서 우리민족을 끌여들여 역사를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최초의 여진의 역사는 중국인에 의해 기록됐습니다. 송막기문은 송나라인이 당시 금나라에 10여년간 체류하면서 기록한 여진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여진의 지도자가 신라인이라 기록했습니다.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송막기문, 중국기록 (1156년)
女真酋長乃新羅人 그 뿐 아니라 고려사, 몽고사, 금사 모두 여진이 원래 신라(고려)에서 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모두 여진인들 스스로의 기록이 아닙니다. 모든 아시아 주변국들의 기록이 다 일치하고 여진인스스로 역사를 쓰기 수백년전 기록입니다. 금사도 원나라때 몽골치하에서 기록됀 역사로 여진인스스로의 기록이 아닙니다. "금나라의 근본은 우리나라 평주사람이다. 나(고려)를 일컬어 부모의 나라라했다. "(고려사 1392년) "金則本我國平州之人, 稱我爲父母之國。"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몽골편찬, 금지(金志)) "其初酋長本新羅人"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원나라 몽골편찬, 금사 (金史), 1261년)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여진과 만주인들이 스스로 역사를 남긴 것은 그로부터 수백년 후 청나라 때 만주원류고(1777년)입니다. 만주원류고가 만주인들이 정통성때문에 역사를 왜곡해 창작해썼다는 것은 헛소리일 뿐아니라 연대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주원류고 수백년 이전에 이미 여진의 역사는 편찬됐고 만주원류고는 그것을 종합한 최종판일 뿐입니다.
만주어는 원래 고대 한민족들이 썼던 여러가지 방언중 하나가 갈라진 것입니다. 만주어나 지금의 한국어나 같은 알타이계이고, 만주족이나 한민족이나 둘다 씨름도 똑같고 집안에 온돌들여놓는 것도 똑같습니다. 게다가 만주족들이 원래 단군을 시조로 제사까지 지낸 것까지도 똑같습니다. 만주족의 역사가 금나라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금나라자체가 신라인 김함보무리가 시작한 것입니다. 한명이 아니라 그 사람을 따르는 무리가 함께 이동했고, 왕족은 신라계 왕비족은 발해계로 집권세력도 한민족입니다. 이들을 한민족과 다르다고 나누는건 엄청난 무리일 뿐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손으로 제살깍아먹는 동북공정이죠.
여진인들은 백두산에 올라 단군에 제사를 지냈던 단군에 후손입니다. 우리나라 단군이 개국한 날을 "개천(開天)절"이라고 하는 것 아시죠? 금나라 여진인들도 개천절때 백두산에 올라 단군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홍익(弘益)인간사상을 이념으로 하는 단군을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라 기록했습니다. 금나라가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는 금사의 기록입니다:
"冊長白山之神為開天弘聖帝" (금사 10장 (金史), 1261년)
(장백산(백두산)의 개천홍성제(단군)를 신으로 삼아...)
"明昌四年十月 ... 行仗五百人,複冊為開天弘聖帝。" (금사 35장 (金史), 1261년 )
(명창사년십월... 오백명의 의장들이 동행하여, 개천홍성제를 거듭 세워다스렸다.)
몽골군에 멸망 당한 후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라를 일으켜 대륙을 통치한 여진족
현재의 한국인과 닮아 있다고 본다.
혈통이나 민족 동족이라는 개념이 뭐그리 중요 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역사에서 그런 개념이 없었다면 왜 미국이 영국을 돕기 위해 독일과 싸웠을 것이며
왜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하고 러시아와 전쟁을 했을 것이며
왜 1400년전 왜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당시의 국력을 총동원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왔겠는가? 또 고려가 거란과 적대 관계를 표명한 이유도 발해를 멸망시킨 적이라는 개념이었다.
(거란의 사신 귀향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인것)
즉 발해를 고려의 형제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거란이 고려와의 27년간 3차에 걸친 침략에서
패배하자 고려보다 더 좋아했던 나라는
거란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만주의 여진족들이었다.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고 속국이 돼기를 청하고
흑수말갈의 여진족 추장이 직접고려에 와서 속국이 돼기를 청했다.
또 여진추장을 데리고 송나라에가서 승전 축하연을 했다고 나온다.
이게 이런 동족 의식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인가?
단 여기서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지도자가 띨방하면
국민이 고생한다는 것이다.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했다고 해도
인조가 잘만 했다면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던 이괄을 여진 방어의 최전방에 좌천 보내다 시피 하고
반란을 의심해 이괄의 아들을 잡아 들이려 하자 이괄군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것이다.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력소모로 인해 청나라의 침략에 대항 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괄의 부하들이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 사실이 알려 지게 되고 청의 침입을 불러 왔다.
만일 당시 여진 방어용 최정예 부대(임진왜란때 투항한 조총부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약2만명)를 보유하고 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패륵 아민이 이끄는 청나라 36000의 8기군도 쉽게 한양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