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이라함은 여러 의미가 다층적으로 존재할수 있지만 우선 가장 객관적이라 할수있는 점은
바로 타자가 본 나의 모습이 아닐까 해요 그리고 이것은 비단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 집단에게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고 실제로 적응되어 왔고요 참고로 고대인 삼국시대에는 당시 문명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여러 왕조들이 전통적으로 책봉호라고 해서 그 국가의 LEVEL을 정하였고 당나라부터는
이러한 관제호가 유명무실해 지면서 사실상 전면 폐지가 되어서 결국 좀 더 복잡한 양상인 사서의 배열과
기록등을 추적해야 하는데요 오늘은 그야말로 간단하게 한번 알려볼까해서용 ㅋ ^^
(1).역사시대 이전은 남사의 국역본을 발췌하면
(2).삼국시대:
개인적으로 중국의 정사(원사를 포함하면 25사 청사까지 하면 26사)를 뒤져서 정리한 당시 책봉호 서열
고구려는 언제나 넘사벽이었고 일본이 백제의 도움으로 처음 국제외교무대에 등장한 것이 436년인데요 이후계속해서 백제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관철되지 못하고 끝나죠 이후 백제인이 유력해 보이는 계체천황으로 왕가가 교체되고
(3).통일신라시대
쟁장사건이라고 해서 일본 사서에만 기록된 것인데 당나라의 하례식당시 동서의 배치에서 신라가 모든 국가중에 1위 일본이 4위의 위치라서 이에 항의한 일본 사신에 의해 일본이 1위 신라가 일본의 위치로 교정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중국이나 한국의 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일본 사서에만 있어요 기록이 ㅋ 그런데 이문제는 최치원 시대까지도 신라가 언제나 가장 높은 자리였던 걸 감안하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의 위상을 알수 있겠죠
당시에 고려의 동아시아에서의 위상은 왕건의 사실상 최후의 통일전쟁인 일리천전투에 참여했던
다민족의 병종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양상으로 가늠해 볼수있는데 중국 정사에서 발췌하면
A.는 남당서 고려열전의 내용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개창하니 당시 동이제국이었던
왜(일본) 탐라(제주도) 환 우라 철륵등의 유목민족국가들이 모두 고려의 밑으로 복속을 했다라는 것이고
B.왕건의 다음인 혜종에 대한 설명으로 역시 '동이군장'으로 표현되어 있죠
역사적 사실과 얼마만큼 부합되는가는 차치하고 글의 목적에 맞게 당시 중국이 인식한
고려의 아시아의 위상을 알수있는 자료라는 점이 중요 한 것 같아요
(5).조선시대
조선시대는 명나라 주원장이 황명조훈 이라고 해서 직접 자신의 마지막 유언으로서 주변에 경계해야 할
국가의 위협적 순위를 엄명으로 남긴것이 있는데 1위가 조선 2위 월남...4위가 일본이라던가 따위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으로 파병되었던 중국의 관리들이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가졌던 인식의 단면인데요 대표적인 몇몇을 꼽자면
曾偉邦의 인식
(명 신종실록 권264)
라던가
茅瑞徵,의 '萬曆三大征考'에서 조선은 면적이 넑고 매우 경제적으로 풍요하지만 오랜 평화로 인해 무비를 소홀히 하여 이와같이 되었다라는 인식등...
“萬曆壬辰 西夏方用兵而倭大入 朝鮮數告急 朝鮮卽古高麗 與遼接壤 修貢
謹 輿地延袤六千里 三都八道饒富有華風 然昇平유(心需)久 不習鬪 其王李昖湎于酒”
간단하게 작성해 보았어용 ^^
역사적으로 이러한 평가를 받아왔던 조선에게 전통적으로 일본이라는 존재는 크게 3가지 였겠죠
1.최대 2만명에 달했던 왜노라고 불리던 왜인노비
2.평생 한반도를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던 왜구
3.거추사등을 통해 늘 진상숙배하고 그에 따른 답례로 하사를 내리던 존재
일본에 대한 이런 양상이 심화되었을 7~800년 이후 혹은 더 근원적으로는
역사시대 줄 곧 계속된 이러한 모습에서
어째서 임진왜란을 미리 충분히 대비를 하지 못했냐는 조선에 대한 비난은 물론 이유를 불문하고 타당하지만 일견 너무 과도한게 아닌가 즉 역사에서의 당시 사람들의 존재론적 한계를 모두 무시하고 과한 비판이
가해지는건 아닌가 늘 생각하게 되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