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건무(建武)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8 (건무) 23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 대승(戴升) 등 1만여구가 낙랑에 들어와 내속(內屬)하였다.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모두 다시 관새(款塞, 관문을 찾아와 복종)하였다.
[출처]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작성자 원한의 거리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 , 7번째 문단.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239424689
위 문단에서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후한은 분명하게 고구려가 태원(太原)에서 노략질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책인 후한서 지리지인 후한서 군국지로 태원(太原)을 확인해보면,
황하이남인 하남성 낙양에서 북쪽으로 1500리 떨어져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12.13.지명이 태원이죠.
즉, 고구려는 산서성 태원(太原)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후한시절에는 안문군(鴈門君).
2. 병주(并州)
① 안문군(鴈門郡)
鴈門郡, 秦置, 雒陽北千五百里. 十四城, 户三萬一千八百六十二, 口二十四萬九千.陰館.[1] 繁畤. 樓煩. 武州.[2] 汪陶. 劇陽. 崞. 平城.[3] 埒. 馬邑.[4] 鹵城, 故屬代郡[5] 廣武, 故屬太原, 有夏屋山.[6] 原平, 故屬太原.[7] 彊陰.
안문군(鴈門郡), 진(秦)에서 설치하였고 락양(雒陽)에서 북쪽으로 1500리에 있다. 10개의 성이 있고 가구수는 3,1862이며 인구수는 24,9000이다.
1) 음관현(陰館縣).[1]
2) 번치현(繁畤縣).
3) 누번현(樓煩縣).
4) 무주현(武州縣).[2]
5) 왕도현(汪陶縣).
6) 극양현(劇陽縣).
7) 곽현(崞縣).
8) 평성현(平城縣).[3]
9) 날현(埒縣).
10) 마읍현(馬邑縣).[4]
11) 노성현(鹵城縣), 옛 대군(代郡)에 속했다.[5]
12) 광무현(廣武縣), 옛 태원(太原)에 속했다. 하옥산(夏屋山)이 있다.[6]
13) 원평현(原平縣), 옛 태원에 속했다.[7]
14) 강음현(彊陰縣)
http://history-backup.tistory.com/305
당연히 북위 40도에 가까운 일식기록은 후한의 것이 될 수 없지요.( 여기는 최소 3000리 )
후한의 일식기록
후한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개인적인 추정 단 1%도 포함 시키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청동기의 경우도 순동과 석기가 함께 사용된 동석(銅石)병용시대가 츠펑 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훙산(紅山)문화 만기(晩期·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에 이미 시작됐고 본격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샤자뎬(夏家店)하층문화도 기원전 20세기경 시작됐다는 점에서 황허문명의 청동기 진입시기(기원전 16세기경)를 훨씬 앞지른다.
http://news.donga.com/3/all/20070927/8493626/1
후한이 기록한 일식기록의 위치의 유적을 확인해보면 청동기 추정연대가 최대 5500년 전입니다.
즉, 충분히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