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2-18 20:24
[한국사] 대원군이 모은 10년 국고를 1년만에 탕진한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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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의 처단을 계기로 민비 정권과 개화파의 세력이 과시되었다. 민비 정권은 스스로 자중하지 않고 커진 세력을 이용하여 9살 세자의 관례식을 거행하면서 간택 문제가 대두되자 망설임 없이 민태호의 딸을 지명하여 1882년 2월에 책빈례를 거행하였다. 더구나 4월에는 대외적으로 미국, 영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하였고, 5월에는 독일과 체결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극도의 재정난 속에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임오군란을 싹트게 하였다. 1874년 이후의 정계 상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과 수호 조규를 맺은 이래 제도를 개혁하고 구미 제국에도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격화되었다. 2. 군제 개혁의 결과로 차별 대우를 받게 된 구식 군대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3. 이재선의 모역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과 민비의 암투가 서로간의 보복전으로 변모되었다. 이런 때에는 혜안을 가진 정치가가 나타나 모순을 해결해야 했지만, 현실은 반대여서 다음과 같이 임오군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 민비 정권의 낭비는 국고의 탕진을 유도하였다. 2. 탐관오리의 농간으로 구식 군대의 급료가 지불되지 못했다. 민비 정권이 국고를 낭비한 것은『매천야록』과 기쿠치 겐조의『대원군전』에 기록되어 있다. '원자가 탄생하고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임금과 민후가 하루에 천금을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도 신하들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아뢰는 자가 없었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하고 큰 돈을 쓴 것은 그 아들을 위한 것이 처음이었다. 세자 책봉 문제로 여간한 경비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세자를 책봉한 이후에도 공신들에게 상금과 청국에 보내는 예물, 사절의 왕복 비용 등 두살의 왕자를 위해 민비는 수백만금의 국고를 낭비하였다. 그밖에도 세자가 약간의 탈이라도 나면 전국의 명산과 대천에 기도를 드리는 한편, 홍재학이 밝혔듯이 무당, 맹인을 궁중에 끌어들여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그 심한 예로는 금강산 1만 2천 봉의 봉우리마다 돈 1천 냥과 쌀 1석, 베 1필을 바쳐 세자의 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무당, 잡배의 굿놀이가 끊이질 않았으며, 특별한 무녀에게는 수천 냥에서 수만 냥까지의 상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여왕 민비가 뿌리는 돈은 김몽용이 한번 춤출 때마다 3천금씩 던졌고, 이유인이 점을 칠 때마다 비단 1백 필과 금 1만 냥의 상을 내렸다. 그 중에서 특히 진령군이라는 무녀는 신임이 두터워 옥관자의 권세를 누려 대관들조차 그녀 앞에서는 허리를 숙였다. 진령군이나 이유인은 이후로도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씨 척족들은 사람도 먹어보기 힘든 산해진미를 가축에게까지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그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렇듯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들은 위축되어 정부의 세입은 해마다 줄었다. 그 예로 1864년, 1874년, 1884년의 실결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864년(고종 원년) - 77만 6천 7백 결 1874년(고종 11년) - 80만 5천 3백 결 1884년(고종 21년) - 79만 1천 1백 결 로서 대원군이 집권한 10년은 3만 결이나 늘었으니 대원군 10년 집정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비가 집권한 10년은 국고를 유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든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1865년 1875년 1885년 콩 4만 7백 섬 4만 6천 섬 4만 4천 섬 밤 3천 2백 섬 2천 3백 섬 2천 3백 섬 쌀 9만 6천 섬 10만 2천 섬 9만 섬 무명 11만 2천 필 12만 필 11만 5천 필 베 1만 3천 필 1만 4천 필 1만 4천 필 돈 11만 2천 냥 11만 1천 냥 8만 3천 냥 위는『조선 재정사』에 기록된 전세의 징수 상황이다. 대원군이 집정한 10년에 비해 민비가 집정한 10년 동안에 밤(栗)을 제외한 경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감소하였다. 이처럼 국고의 수입은 감소하고 있었지만, 왕실의 낭비는 헤아릴 수 없어서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또한 간이배의 농간으로 중간에서 횡령이 많아서 저 수입은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했고 국가에 쌓이는 실수는 훨씬 적었다. 당시 간이배들은 경성으로 운송되는 세납미를 중간에서 일정 횡령하고, 중앙으로 보내는 것에 물을 부어 불려서 6두에 불과한 것을 선혜청에 바칠 때는 관리를 매수하여 1석으로 속여 바쳤다. 황금 은 돈 청전 무명 모시 명주 베 쌀 콩 좁쌀 1873년 151냥 15만 냥 163만 냥 5330동 38동 87동 1559동 21만 석 4만 석 1500석 1880년 144냥 6만 냥 14만 냥 644냥 484동 386동 9만 석 1만 석 4700석 위는 1874년과 1881년에 그 전년도의 재정을 국왕에게 진상한 회계부이다. 둘을 대조하면, 금, 은, 돈과 포목류, 콩 등의 재고량이 격감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 더 한 것은 1882년 이후로는 종래 행하던 회계부의 보고조차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숫자를 꾸며낼 수 없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놀라운 일인 것은 틀림없다. 이렇듯 민비가 집권하고 10년이 채 안되는 1882년 전후에 이르러서는 대원군이 10년동안 축적한 것이 없어진 것은 볼 것도 없고, 백관의 봉급을 결한지 5년, 구식 군대의 급료를 13개월이나 지불하지 못했다. 백관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배를 채울 수 있어서 별개의 문제였으나, 천대를 받는 구식 군인들은 군제 개혁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구식 군인들의 수효는 서울에 5천 명이었고, 훈국의 급료는 보군이 처음에 4두에서 9두까지였다. 대궐 안의 난잡한 굿소리와 음란한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구식 군인들의 불만도 커지게 되었다. 1882년 6월 9일, 구식 군대의 울분이 폭발하여 사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선 6월 5일, 선혜청 앞에는 다른 날과 달리 2영에 소속된 구식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군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한달치의 급료를 지불하려는 정부의 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하인이 곳간을 열고 나눠주는 쌀을 보니 썩었거나 모래가 섞여 있고 그나마도 양이 적었다. 이를 본 구식 군인들은 하인에게 시비를 따졌다. 하인이 군인들을 업신여기자 군인들이 대노하여 하인을 구타하고 이 소식은 민겸호에게 전달되었다. 이 날 궐에서는 오랜 가뭄에 궁중의 상하가 모여 기우제를 거행하던 때였다. 민겸호가 입궐하여 소식을 전하자 포교를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게 하였다. 군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봉기하였으며, 이들은 운현궁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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