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공을 받치는 것은 속국이 아니다.
조공: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친 행위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인 지배수단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는 방물(方物:지역 특산물)을 휴대하고 정기적으로 천자(天子)를 배알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와 신례행위(臣禮行爲)를 행하였다.
천자는 이를 통하여 여러 제후를 통제하고 지배하였다. 그뒤 이 제도는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사상을 기초로 주변 이민족을 위무·포섭하는 외교정책이 되었다.
주나라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 주는(字小) 예가 있었다. 이러한 사대·자소는 결국 대소국간에 우의와 친선을
통한 상호공존의 교린의 예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들자 큰 나라는 약소국에 대하여 무력적 시위로
일방적인 사대의 예를 강요하였고, 이러한 사대의 예에는 많은 헌상물을 수반하는 조빙사대(朝聘事大)가 나타났다. 계속된 전쟁으로 힘의 강약에 의한
지배, 종속관계 대신 헌상물을 전제로 한 조빙사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한(漢)나라 이후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에 제도화되어 조공과 책봉이라는 독특한 동아시아의 외교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조공·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에게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 공식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침략을 둔화시키고
상호불가침의 공존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체제에 편입되고 국제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서,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19세기 이전 만주·몽골·티베트·안남 및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는 모두 중국에 조공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따랐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조공이란 종주국이 받친 나라에게 훨씬 많은 양의 하사품을 내려주어 주변국의 침략을 예방하고 자신은 정치적 우위를 획득하며 받친 나라는 하사품으로 실리를 얻는 하나의 외교였던 것이다.실제로 세종 때 조공의 열배가 넘는 양의 하사품을 받았는데,이 때문에 제정이 어려워져 한때 명이 조선의 조공을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조공을 받쳤다고 속국이라면 한민족 최전성기이자 조공을 가장 많이했던 장수왕,세종대왕 때도 속국이 된다.
2.조선의 왕들은 중국에 알현을 한 적이 없다.
"제후는 천자를 대함에 있어서 해마다 한 번 소빙을 하고 3년에 한번 대빙을 하며 5년에 한 번 조근을 한다"(예기-왕제편)
여기서 조근이란 제후국의 군주가 직접 천자를 찾아가서 알현하는 것으로 중국에 책봉을 받는 주변국들 또한 알현의 의무를 지켜야했다.보통 군주들이 천자를 직접 알현할 때 천자는 더 많은 하사품을 내리기 때문에 속국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또한 중국의 천자들 또한 자신들의 지위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매우 희망하는 사항이었다.그러나 조선을 포함한 한민족의 왕조들은 이것을 고려말 원종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기껏해야 세자나 신하들을 보낼 뿐이었다.이것은 한국이 자주국이기에 실리적인 외교를 하면서도 굴욕적인 것은 최대한 삼갔던 것이었다.
3.제천 행사
옛날 동아시아에서 제천행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였다.천자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천제를 대신하여 이 세계를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제천행사는 독자적인 세계관과 자신들의 주권을 내세우는 것으로 중국의 제후국들이 제천행사를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한민족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대대로 제천행사를 해왔다.조선시대에도 원구단이라는 곳에서 꾸준히 독자적인 제천행사를 해왔다.즉, 조선은 직접적인 명과의 마찰때문에 공식적으로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 스스로 천자국임을 내세우고 있었다.
4.명은 조선을 두려워했다.
명과 조선 초기부터 종계변무 등 꽤나 많은 마찰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성계,정도전 등이 요동 정벌을 주장했었고 이것은 명에게도 상당히 위협이 되었다.당시 요동은 빈 땅이었고 여진족,고려인들이 살고있었다. 그래서 조선에게 요동을 회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만약 조선이 요동을 회복하고 명과 대립 중인 북원과 손을 잡는다면 국가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명나라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다행히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이 제거되고 이성계가 병중에 쓰러지면서 요동 정벌이 무산되자 명은 위기를 겪지않았았다. 그 후로도 명-조선 간의 관계가 좋아졌으나 조선과의 사이가 틀어져 북원과 손을 잡고 쳐들어올까 두려워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기떄문에 조선이 4군6진을 설치하고 여진,왜,류큐,동남아 등과 교역을 하고 황제국과 같은 위치를 자랑해도 상관하지않았다. 임진왜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조선이 왜군과 손을 잡고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었다.(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알게되고 조선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떨어진다.)만약 조선이 명에게 굴복한 속국이라면 명이 두려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