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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05 23:26
[한국사] 후한서로 보는 고구려의 최대강역
 글쓴이 : 밥밥c
조회 : 4,204  

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건무(建武)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8 (건무) 23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 대승(戴升) 등 1만여구가 낙랑에 들어와 내속(內屬)하였다.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모두 다시 관새(款塞, 관문을 찾아와 복종)하였다.

[출처]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작성자 원한의 거리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 ,    7번째 문단.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239424689





 위 문단에서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후한은 분명하게 고구려가 태원(太原)에서 노략질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책인 후한서 지리지인 후한서 군국지로 태원(太原)을 확인해보면,


황하이남인 하남성 낙양에서 북쪽으로 1500리 떨어져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12.13.지명이 태원이죠.

 즉, 고구려는 산서성 태원(太原)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후한시절에는 안문군(鴈門君).


2. 병주(并州)
① 안문군(鴈門郡)
鴈門郡, 秦置, 雒陽北千五百里. 十四城, 户三萬一千八百六十二, 口二十四萬九千.陰館.[1] 繁畤. 樓煩. 武州.[2] 汪陶. 劇陽. 崞. 平城.[3] 埒. 馬邑.[4] 鹵城, 故屬代郡[5] 廣武, 故屬太原, 有夏屋山.[6] 原平, 故屬太原.[7] 彊陰.
안문군(鴈門郡), 진(秦)에서 설치하였고 락양(雒陽)에서 북쪽으로 1500리에 있다. 10개의 성이 있고 가구수는 3,1862이며 인구수는 24,9000이다.
1) 음관현(陰館縣).[1]
2) 번치현(繁畤縣).
3) 누번현(樓煩縣).
4) 무주현(武州縣).[2]
5) 왕도현(汪陶縣).
6) 극양현(劇陽縣).
7) 곽현(崞縣).
8) 평성현(平城縣).[3]
9) 날현(埒縣).
10) 마읍현(馬邑縣).[4]
11) 노성현(鹵城縣), 옛 대군(代郡)에 속했다.[5]
12) 광무현(廣武縣), 옛 태원(太原)에 속했다. 하옥산(夏屋山)이 있다.[6]
13) 원평현(原平縣), 옛 태원에 속했다.[7]
14) 강음현(彊陰縣)

http://history-backup.tistory.com/305




 당연히 북위 40도에 가까운 일식기록은 후한의 것이 될 수 없지요.( 여기는 최소 3000리 )

 후한의 일식기록




후한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개인적인 추정 단 1%도 포함 시키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청동기의 경우도 순동과 석기가 함께 사용된 동석(銅石)병용시대가 츠펑 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훙산(紅山)문화 만기(晩期·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에 이미 시작됐고 본격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샤자뎬(夏家店)하층문화도 기원전 20세기경 시작됐다는 점에서 황허문명의 청동기 진입시기(기원전 16세기경)를 훨씬 앞지른다.

http://news.donga.com/3/all/20070927/8493626/1


후한이 기록한 일식기록의 위치의 유적을 확인해보면 청동기 추정연대가 최대 5500년 전입니다.

즉, 충분히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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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6-09-05 23:46
   
덧붙여서 삼국사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모본왕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이는 후한서의 기록과 똑같은 부분으로
모본왕이 중국 내륙의 태원을 습격했다는 것은 주류사학계의 말처럼 고구려가 압록강 일대에 머물던 작은 국가였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이며
중국 내륙에 위치한 태원을 습격했는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요동이 지금의 요동반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파게티 16-09-06 01:09
   
왜 학자들은 모를까요? 일반인들도 아는대 

요동태수가 있는대 고구려가 저멀리 빙~~~~~~~~~~ 돌아서 태원까지 습격하러간다고 생각하는걸까요?

초딩도알듯  저시절 요동과 지금 요동은 다르다는걸
          
두부국 16-09-06 06:02
   
우리나라 역사학자 학계 대부분이 주류식민사학계들이라 저런것들을 인정하면 경우
전공하는 사람들의 대학교재 등 대부분의 상고사 관련 책자들이 모조리 쓰레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민족혼을 팔아먹은 놈들이라고 할까요?

우리나라 상고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강단사학계들 때문이지요

 그런 역사학계를 대항할 단체가 있다더군요 http://misahyeop.com/gnu/
          
한산대첩 16-09-08 08:50
   
알긴 알죠..

근데 이런걸 하나 씩 인정하다 보면..

지들이 쓴 역사를 첨부터 다시 써야 함 ㅋ
밥밥c 16-09-06 00:05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무력으로 진압한것이 아니라 신의라 .......,  일단 진압하지는 못했지요.

 그렇다면 고구려가 신의를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도 있지요.

 


옥갑(玉匣)은 부여왕의 장례에 사용되었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다른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하는데 (순장되는 이가) 많을 때는 백여 명에 이른다. 왕을 장사 지낼 때는 옥갑을 사용한다. 한조(漢朝)에서는 늘 옥갑을 현도군에 비치해두었는데 왕이 죽으면 이를 가져다 장례에 사용했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그것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하날 16-09-06 00:06
   
위에 두분이 적은 글을 보면 차이점이 있죠.

후한서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모두 다시 관새(款塞, 관문을 찾아와 복종)하였다.

삼국사기
모본왕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후한서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친걸 노략질로 적고 요동태수에 감동해 고구려가 후한에 복종했다고 적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친걸 공격으로 적고 요동태수가 대접을 잘해 화해한 것으로 적고 있어요.

전 이걸 요동태수의 은혜, 신의 이런건 개불알 이라 봅니다.
고구려가 요동을 치니 요동태수가 빌었고 해서 고구려가 철수해줬다는게 맞는 거죠.
     
기파랑 16-09-06 00:16
   
태수얼굴이 잘생겼나 뭘보고 감동하며 복종했을까요
태호복희씨 16-09-06 17:44
   
사서를 누구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인데 우리역사 학자들은 너무 우리나라 역사를 깍아 내리고 있어요.
한심한 일제잔당에서 배운 사학자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 ~~~!~~
중거런 16-09-06 21:29
   
뽕뽕뽕 뽕질이넘어간다. 뽕뽕.
이세민의 당을  게릴라전술로 이겨다고  당과  숟가락같이놓으려는 뽕질에  넘어갑니다.
고구려가 결국당에게 따먹히죠. 백제의자왕의  삼백궁녀와함께.
당황제 거시기가 호강했을듯.
연개소문보셔는지요?
참유동근이처참하더만.  ㅠㅠㅠ
당이세민에게 게릴라전으로 이긴  것을두고.
한미영연합군을 게릴라전으로 박살낸 베남도 쪽팔린다고  이겨다는소린안하던더.

뽕질을 얼마나했어면  뽕뽕뽕
     
꼬마러브 16-09-07 00:44
   
왜 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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