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는, 최씨무신 정권의 가신 집단으로, 국내 빨치산, 혹은 게릴라의 원조라고도 이야기 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민중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려를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들의 기득원을 지키기 위한 난이었다 생각을 한다(물론 이 의견에 꼭 동의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난의 결과 역시 고려인민의 고통만 가중시켰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삼별초, 그들은 1260년 원나라의 압력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조정에 맞서, '승화후 온(친원파 홍다구에 의해 진도에서 죽임을 당함)'을 추대하여 진도(배중손)로, 또, 제주도(김통정)로 옮겨가며 3년간 전투를 펼쳤다.
처절한 대몽골 항쟁을 거듭했지만,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진압됐고, 탐라로 도망친 김통정의 잔여세력도 2년 뒤 소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삼별초가 탐라민의 지지를 받은 세력은 아니었다, 탐라민은 좌도지관과 고려정부 관리의 지휘아래, 환해장성을 쌓으며 삼별초에게 저항하였다. 아무튼 진도와 탐라 그리고 남해안을 점령한 그들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 동맹을 꾀하기도 하고, 또 남해안의 조운로를 장악하여, 고려재정을 위협하고 약탈을 단행하였다--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고려인민들이었다)
기록대로라면,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사서의 삼별초 멸망 기록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유물들이 발굴됐다.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실은,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이 박물관이 소장한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용장성과 오키나와 출토 기와의 모습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유구(류큐)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라는 곳에서 나온 기와들은 막새의 한가운데 둥근 씨방을 두고 주위로 아홉 개의 연꽃잎을 돋을새김하고, 다시 바깥에 연속점무늬(연주문)로 테두리를 두른 고려계 기와였다.
용장성의 기와도 연꽃잎, 연주문 무늬 등의 배치가 똑같으나 다만 꽃잎 수가 여덟 개(팔엽연화문)로 하나 적을 뿐이다.
용장성은,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과 항전하기 위해 진도에 쌓은 천혜의 요새다. 이곳의 건물터 기와가, 왜 수천 리 건너 남쪽의 이국땅 섬 곳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것일까.
삼별초 군사들이 망망대해를 넘어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라 믿을 수 밖에 없는 유물들이었다.
오키나와의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도, 용장성 기와를 본 후 매우 당황해 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고려계 기와들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
오키나와 기와와 모양이 비슷한 비교품을 찾으려고 소장품을 뒤졌다가 거둔 뜻밖의 수확이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 우리에겐 생소해도,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700~800여 년 전의 고려계 기와들이 삼별초 세력의 것이라는 추정은 일본 역사계에서 새삼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녔고 시기도 훨씬 앞서는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다. 현지 학자들은 수십 년째 이 기와를 만든 주체와 시기를 놓고 논란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된 유물이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대형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떳떳이 알린 것으로 봐서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문 기와
문제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이다.
1273년설은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 선단들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추정이다.
탐라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393년설이 유력했다. 고려사를 보면 오키나와의 첫 교류가 고려 우왕 때인 1389년 유구국 사절을 파견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멸망 직전 공식 교류가 시작됐다고 봐야 하므로 양질의 고려 기와를 만드는 고급 기술자 파견은 이런 공식 교류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의 공식 기술자 파견이나 고려 멸망 뒤 상당수 유민이 정착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논지다.
하지만 진도 용장성 수막새 기와의 등장은 1273년설에 더 힘을 실어준다.
오키나와 출토 수막새가 용장성터의 것과 같은 반면, 중국이나 일본 본토계 기와에서는 이런 유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세력 일부가 곧장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까.
동서로 1천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도항 준비를 치밀하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류큐열도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치가 있는 구스쿠(고려계 성곽)
전형적인 구스쿠(고려계 성곽은 아님), 유네스코 세계유산
흥미로운 것은 삼별초가 역사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인들은 지역 세력가들이 '구스쿠'라는 큰 성을 쌓고 경쟁하면서(구스쿠 ぐすく, 御城) 또는 단순히 스쿠(すく, 城)는 오키나와어에서 "성"또는 "요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은 조그만 섬에서 곳곳에 거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점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과 전쟁 기술에 능한 외부 세력의 조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설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이론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한다.
유구국 삼국시대 고지도..삼별초가 영향을 주어 성립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반론) 오키나와에서 나온 ‘대천’(大天)이란 글자가 쓰인 다른 고려계 암수키와의 존재는 이러한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기와는 오키나와는 물론 제주도의 제주목 관아터 등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 제주목이 조선초의 시설임을 감안하면 시기를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 결국 두 가지 연대에 출토 기와의 시기가 걸칠 수 있어, 좀 더 정밀한 고고학적 문헌 검토가 필요한 셈이다. 어쨌든 오키나와에서 삼별초의 흔적을 좀 더 발굴할 수 있다면,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의 탄압에 분노와 한을 품고서, 진도 혹은 제주에서 오키나와로 갔을 것 같다는 가설은 맞을 수 도 있을 것이다.
P/S: 유구왕국의 역사 시대는 800여 년 전부터다. 7세기 중국의 <수서>에 유구가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그러나 여기서 유구는 대만의 백제지방 담로일 수 있다), 사서에 나오는 왕조의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기와 제작 기술, 삼별초 역사는 물론 당시 오키나와의 사회현실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지, 민족주의적 화두로 접근하면 안 될 것이다.
다만, 홍길동의 율도국이나,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파랑도가 어저면 유구를 칭하는 말일수 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아무튼 한을 품은 자들은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끝까지 저항을 한 발해인의 정안국과 그 외 후발해국들의 한도 문득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