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분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민초들 손에 맞아 죽었어야 할" 그런 여자죠.
그런데 하필이면 왜구 낭인들 칼에 난자당해 죽었으니 좋아할 수도 없게 만든 여자입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저희때만 해도 국사 교과서에서 "민비"로만 소개되었고, 국사 시간에 선생님들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민비의 악행들을 자세히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민비"가 "명성황후"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동정을 받는 비운의 여인으로 인식되게 되었느냐?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반친일파 및 반일/혐일" 감정을 정치적 용도로 활용하기 위한 소재의 하나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전교조, 좌익 영화인/연극인들 등이 "민비"를 "명성홯후"로 호칭하며
학생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처음에 명성황후란 연극이 나왔을 때만 해도 저도 의아해 했는데 ....
아무리 우리 민초들로 부터 민비가 증오를 받았더라도, 그래도 우리의 황후인데
혐오스런 왜구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 당했다는 사실이 학생/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민비의 실체에 대해 잘 모르게 된 것입니다.
이글 보고 나서 인터넷을 좀 뒤져 봤더니
참 근거 빈약하고 과장 심한 글이 나돌고 있군요.
- 조선시대의 여성의 정치적 역할이 의미있던 시절은 수렴청정을 했던 몇번 이외는 없습니다.
- 민비가 공식적인 정치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배겟머리 송사 이외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테고, 베게머리 송사의 내용이 외부적으로 공개되어 알려질 수 있는지요? 민비의 악행이나 시아버지와의 알력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민비'의 작품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곳에서도요. 혹시 있으면 공유 부탁.
- 민비와 민씨가문(외척)을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외척가문에게 있어서 중전은 낙시끝에 걸려진 바늘 쯤이지 중전이 정치의 중심은 아닙니다. 민씨 가문이야 정말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그것의 주도인물처럼 민비를 같다놓은 건 정말 우습군요. 심지어 '민비정권'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더군요. 민씨정권이라면 몰라도 ㅎㅎㅎㅎ...
- 이런 비난의 대부분을 실제로 받아야 하는 사람은 고종입니다. 민비가 이뻐서 그랬든 다른 이유가 있든 그런 신하를 선택한 사람이 고종입니다.
- 고종을 아내에게 속은 사람처럼 저 비난의 핵심에서 빼놓고, 민비에게 모든 비난을 몰아가는 것은
뇌물은 아내가 받았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정치인들과 동일한 수준입니다.
민비가 쌍X이긴 하지만 당시 국가 지도층 전체의 무능과 모럴해저드가 민비를 통해 나타났을 뿐입니다. 즉, 민비만 나쁜X이 아니었던 것이죠. 영, 정조 이후 60년간의 세도 척신정치로 인재풀이 바닥나고, 각종 환경 재앙으로 국가 생산력은 계속 떨어지고, 그와중에 근대적 세제개혁은 계속 미룬 채 민란이나 조장하고. 대원군도 그다지 능력이 아주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는지 국제 시류에 눈귀를 닫은 쇄국정치와, 당백전 발행으로 국가 경제를 아작내버린 장본인이어서 좋은 평가를 받긴 힘들지요. 민비는 그래도 대원군이 목숨걸고 철폐한 세도척신 정치를 전대미문의 스케일로 부활시킨 장본인이라서 더 욕을 먹는 것이구요. 물론 남편인 고종의 암묵적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 했던 일인지라 부부가 쌍으로 나라를 망치게 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종황제도 나라가 일본의 사정권에 들어간 와중에 끝까지 전제군주권 지켜보겠답시고 여러 친위개혁뻘짓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키워준 이완용 같은 놈들이 모조리 친일파로 변절해 버려 뒤통수 맞고 퇴위나 당하는 꼴을 겪었죠. 이준용 같은 황족 머저리들은 황실을 지켜주기는 커녕, 황제자리나 노리고 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걸 알자 바로 친일파로 변절해 버렸고요.
지금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은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의 과실을 과대 포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자신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틀렸다며 후사를 부탁하는 편지가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과연 치고 박고 싸우던 사이였는지 의심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