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지무라 신이치는 한때 일본에서 ‘고고학의 마법사’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그는 1981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속속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여, 일본의 역사를 70만 년 전까지 올려놓는 업적을 달성했지요.
그러나 후지무라의 발굴은 대부분 거짓이었고, 2000년 마이니치신문의 몰래카메라에, 후지무라가 미리 준비한 유물을 발굴현장에 파묻는 장면이 촬영됨으로써 그 사기극이 들통 났습니다.
후지무라의 고고학 사기는 20여 년간 162개 유적 발굴에 자행됐는데, 수많은 해외 고고학자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제대로 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그 대신 후지무라의 사기행각에 고취된 일본인들은, 일본에 ‘4대문명’에 버금가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후지무라 신이치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왜곡과 사기는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만세일통 이라는 일왕의 가계도도 사기이고, ‘무사도’도 사기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조작이, 전방후원분을 이용한 역사왜곡입니다.
일본은 마치 전방후원분이 일본 고유의 무덤양식인양 말하고 있으며, 전방후원분의 원형을 가진 고구려고분이 발굴됐다는 것을 애써 감추고 있습니다. 1999년 발굴된 북한 자강도 운평리고분군4지구제6호분은 전방원형분의 초기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건축 시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전후로, 일본의 전방원형분 보다 수백년 앞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대마도 인근에 위치한 이키섬은 133.7㎢에 불과한 작은 면적이지만, 13기의 전방원형분이 밀집해 있는데, 그 형태는 고구려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형태였지요. 즉 전방후원분은 고구려의 무덤양식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정착된 것입니다.
일본은 240기에 달하는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을 ‘능묘’로 지정하여 발굴을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랑하는 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인 ‘인덕왕릉’에서 출토된 유품이 준 충격 때문입니다.
인덕일왕은 일본의 제16대 일왕으로 재위 313년 2월 14일 - 399년 2월 7일이라 주장되고 있지만,일본 내부에서도 86년 이라는 장기간의 재위 기간에 의문을 표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모순점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인덕일왕이 더 혼란을 가중시킨 것은, 그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상당 수가 백제의 유물이고, 그 연대가 5세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물의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환두대도와 거울 등 5세기 백제의 유물들이었습니다. 그 뒤로 일본은 전방후원분의 발굴을 ‘능묘’ 보존이라는 구실을 대면서 막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남부에서 발견된 15기의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임라일본부설’이나 왜의 백제지역 진출과 같은 역사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역시 폭포수가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른다는 식의 궤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국 남부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초기 형태를 띠며 왕릉이 아닙니다. 그 무덤들의 주인공은,
1. 고구려 계열의 원형 무덤을 차용한 인물
2. 왜국 출신으로 백제에 파견된 인물
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것이 ‘임라일본부설’은 물론이고 왜국이 백제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수서왜국전에 왜국의 인구는 호수 10만 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당시 75만 호의 인구를 가진 백제와 비교가 안 되는 규모로, 왜국이 일시적으로 백제를 도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군사적으로 앞서 백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한 것입니다.
---------------------------------------------------------
네, 일본의 그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인덕왕릉 속에는 백제계, 가야계 유물들이 가득하죠
발굴을 하면 할 수록 한반도계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파다가 다시 덮은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전방후원분의 원형은 한반도에 더 크게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