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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3 17:00
[기타] 정묘호란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969  


1. 개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2. 배경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정권을 잡은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 후금과의 외교를 끊었고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였던데다 더 큰 원인이라고도 볼수있는 극악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있었던 경제적인 문제도 겹치는 상황인지라 이를 타개함과 동시에 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 진입을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1]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조선에 대해 온건하던 태조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태종 홍타이치[2] 는 이런 여건들로 인해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3. 전개

1627년 l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참고로 정봉수라는 사람이(민간신분)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항전은 나름 당하기만 한 전황상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이립이 의병을 모아 적의 진격을 늦추었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정묘조약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전쟁 이후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3]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4]시켜 가도의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고 지역 등 근처 유목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5]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결국 이후 12월 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흑역사를 남기고 만다.
  • [1] 이괄의 난(인조 1년)으로 인해 북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 [2] 그는 아버지 누르하치와 달리 조선에 대해 침략과 같은 강경한 대처가 필요하고 보았다.
  • [3] 당시 화약을 주도했던 후금 관리는 이후 목이 잘렸다. 또한 이 당시의 후금이 품은 불만은 이후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된다.
  • [4] 화약 내용을 사실상 어기고...
  • [5] 그렇게 불려진 세는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표출되고 만다.

https://rigvedawiki.net/w/정묘호란

가도사건(모문룡)

가도사건은 1621년(광해군 13) 후금[後金. 훗날 청(淸)]에 쫓긴 명(明)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한 이후 조선-명-후금 사이에 일어난 사건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모문룡의 군대가 가도에 주둔한 것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해서 온 것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아무리 밤이 깊다 하더라도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 관련 비상사태를 담당했던 임시 기관. 훗날 가장 강력한 상설기관이 된다)를 소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광해군일기』 중초본 167, 1621년(광해군 13) 7월 25일 갑자 3번째 기사]을 비롯해 후금과 명에 사람을 보내서 두 나라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후금 견제를 목적으로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허락했다.
모문룡의 입장에서도 후금을 견제하고, 조선과 후금이 연합하는 것을 견제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가도에 주둔했다. 또한 지상전에 비하여 해전(海戰)에 약한 후금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모문룡과 인조반정 이후였다.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대부분인 가도 주민들을 모두 군대로 편입시켜서, 농사와 군사 훈련을 병행시켰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후금을 급습했다.
후금에게 모문룡의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동시에 모문룡을 지원하는(지원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후금의 입장에서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1627년(인조 5) 조선이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받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이 조선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모문룡이 군인 본연의 일만 했으면 좋았겠으나, 모문룡은 갖가지 이유로 지속적으로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조선 조정은 사대(事大)에 입각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강요받았고,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로 군량 제공을 하지 않았으나, 인조가 등극하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량 제공은 1623년(인조 1)이 돼서 시작됐다.
즉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집권 이후 모문룡의 주둔 비용을 조선 조정이 부담한 것이다.
또한 조선 백성들이 후금을 지원했다는 핑계로 평안도에 상륙해서 조선 백성들을 구타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의 군대인 모문룡과 그 군사들의 악행에 조선 조정과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어쩌면 할 생각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조와 조정이 조선의 백성을 모문룡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만 문제가 아니다.
기울어져가는 명과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그 사이에 낀 조선에서는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신중한 중립 외교를 펼쳤으나,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는 성리학의 화이(華夷)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친명반청, 즉 명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외교를 펼쳤다.
이것도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함께 조선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됐다.
결국 모문룡은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모한 전투를 일삼아 실패를 거듭했다는 이유로 명의 조정에서 파견된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당했다.
모문룡에 대한 평가와 그의 악행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남아있다.

모문룡은 남쪽 지방의 사람이다. 요양성(遼陽城)이 함락될 때 탈출하여 여순(旅順) 어귀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나와 의주 주위에 기거하면서 견제의 계책을 하였다. 처음에는 세력이 고단하고 미약하였으나, 가도(椵島)로 들어가 웅거하면서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노적[奴賊-여기서 노적은 후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들이 동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요동의 백성 2, 3십만 명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조정을 속여 해마다 황실의 은(銀) 20만 냥을 끌어내었다. 그러나 암암리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무리들과 결탁하여 내당(內璫-황후나 후궁의 거처를 의미함. 필자주.)으로 들여보내고, 가도에 필요한 식량은 우리나라에 부담시켰다. 그들은 거짓으로 첩보를 올리고 심지어는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 전벌의 공적을 떠들어댔다. 외로운 섬에서 칩거하면서 위세부리는 것만 일삼았으나, 공상(功賞)은 더해져 벼슬이 후군 도독(後軍都督)에 이르렀다. 무진년(1629, 인조 7)에 이르러, 원숭환이 명을 받고 산해관을 나와 그 진상을 알고는 쌍도(雙島)로 불러내어 베어버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167권, 광해군 13년 7월 26일 기사.

이 기록에 따르면 모문룡은 조선은 물론이고, 명의 조정과 내시들에게까지 촉수를 뻗치고 뇌물을 바쳐서 그 지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이 인조반정 직후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조 집권기에도 모문룡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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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miky 18-01-03 17:47
   
광해군의 중립정책에 대한 거품이 빠진지가 언제인데;;
여전히 광해군때는 중립정책으로 청과 사이가 좋았으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으로 나빠졌다는 식의 기술이 여전한지 모르겠네요.
     
구름위하늘 18-01-03 19:30
   
아직도 일반적인 인식(예: 공무원 시험의 광해군 인조 관련 내용)이
광해군 중립외교 vs 인조 친명배금 인데,
혹시 거품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mymiky 18-01-03 19:44
   
애초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란 개념을 처음 만든게 일본학자들 입니다.

가생이에는,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 희안하게 광해군은 좋아하더군요;;

일본이 정치적인 계산으로 띄워준 왕이 2명 있는데,
대표적으로 광해군과 신라 마지막 경순왕 입니다.

왜냐?

지고 있는 나라(명)- 뜨고 있는 나라(청) 에 대입하여
지고 있는 나라(청)- 뜨고 있는 나라(일본제국) 그대로 가져왔거든요.

마찬가지로, 지고 있는 나라(신라)- 뜨고 있는 나라(고려)
경순왕이 결국엔 고려에 투항하죠.
피 흘리지 않고 신라라는 나라를 고대로 고려조정에 바쳤습니다.

일본이 이것을 조선인들에게
옛 조상들의 이야기 속에서 본받으라고 주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띄운게 광해군과 경순왕 입니다.
               
mymiky 18-01-03 19:53
   
광해군이 중립정책을 할만큼 조선의 상황이 만만한게 아닙니다.

누구는, 중립외교를 안하고 싶어서 안하나요-.-;;
능력이 안되니까 못 하는 것이죠.

모든 외교는 원교근공 입니다.
멀리 있는 나라는 친하고, 가까운데는 친다는 옜 고사죠.

광해군 즉위때 권력을 누가 잡았습니까? 북인들 입니다.
근데, 북인들이 중립정책을 지지했던가?

아니거든요.. 사르후 전투때도 조선원군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게 북인들 입니다.
북인들이 광해군 편이니까, 광해군과 똑같은 주장을 내면서, 그의 힘을 실어주었을 꺼라고 생각한다면,, 착각 입니다.

사르후 1만 3천명 보내서, 거의 다 죽었죠..

혹자는 강홍립의 밀지설을 주장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사실여부는 불확실 한 것입니다.

혹여, 밀지를 받아서 조선군이 대부분 살아서 귀향 했다면 모르겠지만
뭐 그것도 아니였고..

광해군은 명 황실에, 책봉 받기 위해 어마어마한 로비를 했던 왕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에게 뇌물을 못 받아본 명 관료들은 바, 보 소리 들을 정도로
당시, 명나라 입장에선 광해군은 봉이고, 호구로 단단히 찍여있었습니다.
                    
mymiky 18-01-03 19:59
   
광해군이 탄핵되자, 명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충신이 왜 폐위 되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광해군은 명나라에 충성을 바친 조선국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것은 애초에 선조의 서차남으로 태어난 광해군의 정통성이나 입지가
약점이 되었기에,, 그것을 만회하고자 돈빨로 때운 것에 가까운데,,

물론, 인간적으로는 광해군이 불쌍하게 생각이 되는 부분이지만..

어쨎거나,, 조선으로써는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일이였고,

광해군의 궁궐공사와 더불어, 안그래도 전후 어려운 나라 살림에
명황실에 뿌리는 뇌물은, 조선의 국고를 거널나게 하는 행동이였던 것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결론-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까보면,,
중립정책을 했다고 볼만한 내용이나 실체가 모호하며,

오히려 사르후 전투때는 조선은 명의 원군을 보내,
명의 편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는 점이 역사적 팩트 입니다.
                         
구름위하늘 18-01-03 20:16
   
인조반정의 이유가 광해군이 존명사대를 어겼다는 것은 억지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언급된 내용 중립외교라는 것에 대한 거품(?) 제거의 내용으로 보이진 않네요.
명나라에게 그렇게 비추어진 것은 외교적인 성공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혹시 명황실에 뿌리는 뇌물이라는 것이 통상적인 조공 관계를 벗어나는 사건이 있었던 건가요?
                         
mymiky 18-01-03 20:24
   
명나라에게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뇌물을 뿌려댔으니,,

명나라에서는 당연히 광해군을 좋게 보았죠..
자기 주머니에 돈 챙겨주는 사람 싫어하는거 봤습니까?

이전만해도, 명 사신이 조선에 오면,
조선에 누가 글을 잘 쓰는 명필이다고 하면
그 사람의 서예 작품이나 기념으로 받아가거나,

조선의 인삼 같은 특산물을 받아가거나 하는 것이였는데..

광해군이 돈을 엄청 퍼다주고 난뒤에는, 그게 전례가 되서
돈 찔려주는게 관습처럼 되었죠.

그걸로 조선 신료들이 어쩌다가 나라가 이모양이 되었는지ㅉㅉㅉ
국고가 텅텅 비는데, 왕이 돈을 너무 함부로 쓴다고 궁시렁 거리는게 실록에 있습니다..

드라마에, 중국 사신들이 속된말로 왕서방 이미지로 나오는 경우가
주로, 광해군 시기때 중국 사신 이미지임..

애초에, 광해군이 적장자 였거나,
최소한 왕비의 소생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되었겠죠.

광해가 그랬던 것은,
자기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니까요..
                         
구름위하늘 18-01-03 20:32
   
잉? 조공이라면 분명히 명황실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명나라 사신에게 뿌리는 뇌물은 명황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텐데요?

명사신의 횡푀와 그 접대가 뇌물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이미 재조지은을 자처한 선조 때 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서 부터 선조도 신분 때문에 대명 관계에서 약세를 아주 많이 보이던 상태였죠.
                         
mymiky 18-01-03 20:57
   
선조는 방계였지만, 명종이 살아있을때부터
의모(義母)인 명종 왕비가 손수 찜뽕! 해논 후계자였고

명의 책봉도 무사히 받았던 왕인데다가
딱히 경쟁자들 없이 왜란 전까진 무난하게 20년동안 통치했습니다.

선조는 왜란만 아니였더라면,
성군으로 역사에 남았을꺼라고 하죠.
 
선조는 왜란때 원병 접대때문에, 그 시기만 -잠시- 힘들었다면

이와 달리, 광해군은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만력제 아들들의 싸움에
(여기도 장남이랑 4남이 황위 쟁탈전을 수십년 했음-.-;;)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명나라 책봉 받는데 힘들었음..

광해군은 세자 책봉부터~ 국왕 책봉까지 다 험란했던 편임.

광해는
명나라 사신에게만 단독으로
뇌물을 뿌린게 아님..

사신에게 준 보따리 속에는,

명나라 돌아가면 이건 니네 황제님꺼
이거는 총리꺼
이거는 어디 장관꺼
또 이거는 어디 부서의 누구꺼.. 니가 나 대신 좀 전해줘~

그리고 빨리 책봉 좀 해달라고 해줘요- 뜻이 포함된..
뇌물이 바리바리 쌓여 있었습니다.

대체로 조선왕들의 책봉은 형식적인 것이여서
다른 왕들은 무난하게 받았었는데

광해군은 좀 예외적인 예로,
역대 조선왕들 중에서 제일 힘들게 받은 왕임.

광해는 애초에, 왕비 아들로 태어났거나
걍.. 종친으로 조용히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 사람임.
               
구름위하늘 18-01-03 20:05
   
일제가 경순왕을 띄웠다고요?
그런 이야기도 처음 듣네요.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제가 국사 배울 때도 경순왕에 대한 띄워주는 내용은 전혀없었는데요. 신라는 이미 그 이전에 국가의 존립이 많이 희미해진 상태로 설명되었죠.

광해군에 대한 일제의 띄워주기였다는 식의 정황적인 사안외에 구체적인 사료나 증거는 어떤 것이 있나요?
                    
mymiky 18-01-03 20:15
   
님이 국사를 배울때는 일제시대가 아니잖아요 ㅋㅋㅋㅋ

오늘날, 현대에 경순왕은 그냥 신라 마지막 왕일뿐이죠..

다만, 100년전엔 경순왕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순순히
피를 흘리지 않고 자국을 고대로 고려에 넘겨준 현명한 왕으로
비록, 비운의 왕이지만,, 말년은 좋았던 왕이란 평가를 받았죠.

일본이, 고종에게 신라 경순왕을 닮으라고 해야
말빨이 서기 때문입니다.

고종에게, 순순히 조선을 우리 일본에게 넘기고, 너는 편하게 살아라.
그런 뜻으로요..
                         
구름위하늘 18-01-03 20:26
   
혹시 일제시대에 국사를 배우신 분인가요?
개인 의견이 아니라 참조가능한 자료가 있다면 관련 내용을 링크 좀 해주세요.

제가 찾은 구글 검색으로는 일제가 띄워주었다는 내용을 찾기 힘드네요.
오히려 반대의 뉘앙스가 있는 기사만 발견(왕릉급으로 존대받다가 한일합방 이후 존재를 잃어갔다..)

승리한-패배자-경순왕-왜-임진강변에-묻혔나
http://leekihwan.khan.kr/entry/%EC%8A%B9%EB%A6%AC%ED%95%9C-%ED%8C%A8%EB%B0%B0%EC%9E%90-%EA%B2%BD%EC%88%9C%EC%99%95-%EC%99%9C-%EC%9E%84%EC%A7%84%EA%B0%95%EB%B3%80%EC%97%90-%EB%AC%BB%ED%98%94%EB%82%98
                         
mymiky 18-01-03 20:47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양위를 종용하던 중

"신라 경순왕도 국운이 다했음을 알고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지 않았습니까? 전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군요.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대리청정(섭정)을 맡기는 것으로
양위를 막아보려고 했으나

히로부미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고종의 대리는 양위의 의미가 명백하다」고 주장
당초 고종의 의사를「양위」로 지 마음대로 날조해 보고하였고

결국, 고종도 순종도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양위식이 이루어 졌습니다.
                         
구름위하늘 18-01-03 21:24
   
흠... 억지같아 보이네요.
양위를 종용하면서 옛사례를 든 것이 경순왕을 띄운 것이라고요?

"뛰운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시한 내용은 그냥 언급한 수준 입니다.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니
답변에 감사합니다.
숲속의소녀 18-01-03 21:58
   
이른바 '소중화' 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조선의 집권상류층인 왕과와 양반 사대부들이 중국을 제외한 이웃나라 모두를 소중한 이웃 사촌으로 생각치 아니하고, 미천한 '오랑캐'로 여기는 정신나감을 넘어선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다가 일본에게 임진왜란이라는 크나큰 출혈을 맛 보았으면 정신을 차리는 것이 동물의 본능일텐데... 그놈의 종교에 가까운 '친명주의'를 내세우며 이번엔 과거에 금나라라는 큰 나라를 세운 적 있던 여진에게 온 갖 모욕감을 주게되다가 결국 또 얻어터진 것이 병자호란이죠. 사실 이 때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없앴어야 했는데.. (사실
 제가 청의 황제라면 반드시 없애고 맙니다.)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북벌' 운운하다가 흐지부지 되고.. 나중엔 아예 서양 제국 자체를 미개한 오랑캐로 보다가 개화시기를 놓치고... 또 다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죠. // 결론 : 조선 사대부라는 존재 자체가 한국/조선 민족에게 도대체 어떤 긍적적 요소가 있는지?? 심히 의심 스럽죠.
     
mymiky 18-01-03 22:32
   
1. 당시 동아시아에선 서로가 소중한 이웃사촌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현대 정치외교 개념은 근대기에나 들어왔고요.

중국의 화(華)- 이(夷) 의 개념을
주변나라들도 영향을 받아, 자기들만의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조선도 소중화 사상이 있었고, 베트남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일본 나름의 화이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친명주의를 내세우며, 여진에게 온갖 모욕감을 주었다는데?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고, 여진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늑대와 같습니다.
늑대가 무섭다고, 호랑이를 무시해선 안되죠.

더구나, 청나라가 산해관도 못 꿇고 있었던데다, 앞날은 아직 유동적이였고,

과거 금나라와 남송의 예처럼, 남북조로 몇백년을 대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금과 명나라도 어찌될지 모르는데?
조선이  어느 한쪽과 척을 지거나 외교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게 더 무리한 주장입니다.
          
mymiky 18-01-03 22:50
   
3. 청의 황제라도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못 없앴지요.
왜냐? 아직 청나라는 그럴 능력이 안 되었으니까요.

운좋게 서울까지 내려와서 점령하고 약탈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점령과 지배는 다릅니다.

청도, 중원을 먹기까지는 병자호란 뒤에 8년을 더 싸워야 했지요.
애초에, 병자호란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방 안정+ 약탈을 하려고 내려온 것입니다.
후금의 인구 대부분은 심양과 요양 부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 지역은 거의 사람이 없었음. 땅도 거칠었고,여진족들은  농사 기술도 부족하여
포로로 잡아간 조선, 명나라 포로들이 농사를 지었죠..

4. 북벌론은 진짜 북벌을 하려고 한게 아니라, 집안 단속의 개념에 가깝고..
(미국도 맨날 중국 못 이긴다, 러시아 무섭다,, 하면서 우리 국방비 더 올려죠~~
 단골 레파토리인 것과 비슷함)

효종은 바, 보가 아님..  북벌을 왜함?
청나라가 이미 중원 입성에 성공 했는데 ㅋㅋㅋ

북벌론 까보면, 대부분은 세금 확보, 성벽 보수 비용임..

5. 개화 시기를 놓쳤다?

애초에, 서양 국가들이 조선에 좋은 방식으로 친해지자고 다가온게 아닙니다.
함대를 끌고와 대포를 쌓죠;;;

어느 나라든지, 이런 식으로 다가오면 싸우기 마련이죠.

일본도 비슷할텐데요?
다만, 일본은 원래 강한 자들한테 납작 엎드리는게 버릇이라
서양 함대에 굴복해 개항한게 운좋게 대박난거고,,

이에 반해,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 군을 물리치고 방어한 것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것으로 개화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베트남이나 필리핀처럼
프랑스나 미국 식민지 꼴이 되었겠죠..
 
6. 조선 사대부도 개개인마다 다른데, 일반화 시키는건 어렵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귀족, 상류층 계급은 있어왔습니다.

왜란, 호란때도 의병장들 보면 거의 다 양반 출신들 입니다.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지식이나 교양을 배울수 있고,
사람들을 통솔하고, 전략도 세우고 그럴수 있죠.

근대기 지식인들도 대부분 양반/ 중인층 입니다.
     
꼬마러브 18-01-03 22:32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과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재에는 배척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미래에는 배척 받을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현재 우리의 시각으로는 조선시대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저는, 당시의 사람들이 최선 내지는 차선... 그것도 아니라면 차악의 선택을 했으며, 그것을 실리라고 여겼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무시하고 현재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재단하다 보면... 수많은 오류와 부딪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으로는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가지고, '왜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한 거지?' 말할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직접 겪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현실 말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하등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수준 낮다' 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발생합니다.
          
이해한다 18-01-04 15:12
   
훌륭합니다. 동의합니다.
          
Marauder 18-01-04 18:37
   
누가봐도 명은 초강대국이고 청은 신흥국가였는데 명이 그렇게 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장진동 18-01-05 00:25
   
헬렐레하다 정권 빼앗긴 광해나 개인감정으로 정권 탈취한 등신인조나 변하지 않는 공통점은 둘다 띨띨했다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이기 역사에 진실이지라 ㅋㅋㅋㅋㅋ정치,사회,경제적으로 왜란의 휴유증을 극복하지 못해서 일어난게 호란이지요 ^^조선의  국가 역량이 엉망이였고 이런 상태로 구한말까지 열심히 달려갔고 결국엔 폭망에 이르죠 뭐 중간에 벗어나보려 빤짝 했지만 결론은 폭망이였죠 히히히
     
mymiky 18-01-05 00:43
   
어느 나라나 흥망성쇠는 있습니다.
항상 잘 나가는 나라도 없고, 항상 못 나가란 법도 없어요.

그렇게 기세 좋던 청도 무너졌습니다.

만주족들은 천만명이나 있지만, 만주어도 이미 사어이고
만주족들은 자기 민족 언어도 잊어먹었죠.

실제로 만주족인지?  한족이 만주족 행세를 하는건지?알게 뭡니까? 
만주에 자치구가 하나 있길 하나요?

홍타이지는 역사의 승리자지만,, 글쎄요. 지금 만주족 꼴을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이런 모습을 바란 것은 분명 아닐텐데요..

또한, 일본의 히데요시 가문은 2대로 멸절했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히데요리가 요도가 바람피워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중 하나인데.. 뭐 어쨎거나..)

아니러니하게도,
님이 비웃는 그 조선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잘 남아있고,
자기 문화를 지키며 살고 있으니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입니다.
          
장진동 18-01-05 07:17
   
조선도 흥망성쇠에 따라 망했고 마지막은 아주 저주받은 왕조처럼 비참했죠 그래서 요즘도 가끔 욕쳐먹는 왕조고 ㅋㅋㅋㅋ욕쳐먹어도 할말없는 왕조고 ㅋㅋㅋㅋ
아참  한몽연합 언제해요? ㅋㅋㅋㅋㅋ
               
mymiky 18-01-05 13:51
   
제 생각에는, 조선이 마지막 왕조라서, 그 어느 왕조보다
자료가 풍부한 편이라, 더 욕먹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또한, 조선이 기록을 중요시 한 나라라, 가능한거라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해도
이전 왕조들보다 서민 생활에 더 신경써준 왕조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란은 직접 전투기간이 한 3년, 병자 호란은 2달, 
조선 520년 동안에, 전쟁 기간이 길지 않아요..

어찌보면,,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에서
전쟁이 참 없었던게 조선 시대 입니다.

님이 귀족으로 태어난다면,
골품제 있는 신라나, 음서제 있는 고려가 좋을 것이고

일반 백성으로 산다면, 조선에 태어나는게 평탄하게 살기엔 좋습니다.
서양보다 복지 시스템을 먼저 도입한게 조선이기도 하니까요.

님이 고아 또는 몸에 장애가 있어도
고려에선 길바닥에서 얼어 죽든, 굶어 죽든 신경도 안 쓰겠지만
유교국가 조선에선 관청에만 가면 최소한 죽진 않아요.. 공짜 밥도 주고요-

마지막 모습이야,
어느 나라나 마지막 모습은 비참하죠.안그런 나라가 있나요?

조선만 일반화 시키면 곤란합니다.

제가 중국 각 마지막 왕조의 마지막 모습 한번 읊퍼 드릴까요?
그러길 원하시면 말만 하세요.

잘 할수 있으니까요..

한몽 연합이 갑작히 왜 튀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

한몽연합은 몇년 전부터 인터넷에서만 떠도는 소리로,
양국의 정부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현실성이 없으므로, 하지 않을 겁니다.
Marauder 18-01-05 09:50
   
개인적으로보건데 청은 조선에 잘해준 편입니다. 조선이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먹을것으로는 매우 풍부한 나라이며 산악지형이라 침범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전쟁의 진행양상을 보면 만리장성이 설치된 명나라에비해서 어렵다고 볼만한 구석은 없는것이죠.
 물론 조선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포로로 끌고갔지만 명나라에 비교해보면 간단합니다.
양주학살역시  명, 순이 건재하던 시기에 펼친 학살이었고 같은 논리라면 조선이라고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었죠. 뭐 물론 그에대해 많은 논란이있긴한데 타국가에 비하면 역시...
뭐 명나라가 어렵다면 같은 여진족들 촌락 점령할때 그들에겐 뭐 동족이니까 잘대해줬냐? 글쌔요...
     
shrekandy 18-01-06 05:56
   
솔직히 조선도 전쟁 이후 청나라한테 외국 서열 1등대접받으면서 나름 잘 지낸게 사실이죠, 기록에도 풍부하게 남아있고. 사람들이 잘 몰라서 문제지만...

반대로 정작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선전했던 베트남이나 미얀마같은 국가들
물론 거리도 멀고 외교적 중요성도 떨어지긴했겠지만 조선이 단순 썩어빠진 약소국이였다면 이런 국가들보다 더 좋은 대접은 불가능했겠죠
          
장진동 18-01-08 12:09
   
청 입장에선  두메산골 첩첩산중 조선에 관심이 없었던거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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