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여리에 있다. 옛날의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
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능,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의 지역에
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
은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경계할 줄 알고, 후하여, 노략질 하지 않
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읍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은 고려와 비슷하고
모자는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혹독하고 급
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이 음란하거나 투
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여, 죽이고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
다. 여자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예맥의
땅이라 한다.”
-<위서>두막루조
(두막루국은 5세기에서 8세기에 존재했던 국가임. 백제를 남부여 어쩌고 하
듯 윗글에 보면 북부여 어쩌고 하고 저 북방영토에서도
농사짓는 오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죠.)
<고구려 문명권과 금청사.>
이건 이전에도 매번 주기적으로 올라왔던 글인데
예전에 지나가면서 몇번 말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관련 내용을 이야기 하면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제대로 연구나 이해도 없이
신라계 혈연 어쩌고로만 이야기하면서
금사를 따구리 시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사람은 청사를 너무 쉽게 우리 역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도 존재함.
한가지 사실은 여기서 제 관련 글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제가 올린 글에서 내내 이야기 하는게 고구려 문명권임.
<문명이란 단순히 한개인이나 한순간의 영웅 혹은 순간적 우연의 산물이 아
니라 거대한 인간들의 상호작용속에서 정신과 물질이 과거의 연원을 소산으
로 유구한 시간속에서 쌓아온 총제적 산물이라는 점임.>
사람들이 이런 문명권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상당한데
<오늘날 학계에서도 따로 우리를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 혹은 동방문명권으
로 그냥 이야기 하려는게 아닙니다.>
이는 신석기 시대부터 이미 만주와 한반도가 거의 동일 생활권으로 교류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이는 이후 본격적 청동기국가인
고조선 시기에 가면 이미 제주도까지 우리 고조선의 독특한 묘제인 고인돌,
동검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고조선 토착 재지 5부족의 기반하에 나온게 고구려이고 이미
초기 고구려 국내성의 건물을 보면 조선 건축물보다 훨씬 상당한 크기를 보
이고 있음. 즉 초기부터 상당한 문명역량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한반도 북부보다 문명이 열악한 남부에서조차 백제의 초기 한성 시대
를 여는 풍납 토성이 발굴되여 십수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원삼국이니 하는 용어나 삼국 중기에 가서야 고대왕국 어쩌고 하는
일제 식민사관식 캐소리 하는 학자는 욕바리 쳐먹는 시대 상황임.
그리고 이런 천년사직의 곤고한 고구려는 신라등에 고구려 제국의 한
신하국으로 삼았던건 여러 기록에서 나옵니다. 물론 기록이나 고고학적으로
경상도 역시 고조선 유민이 세웠고 가야나 경상도 유구에선
오늘날 따로 삼한이니 이런식의 개념보다 그냥 부여계가 출토되는 상황
임.
<뭔 자꾸 삼한 어쩌고 한반도가 섬이라서 배타고 만주와 동떨어진 생활권에
서 고조선 삼국시대로 가면서 곤고한 고구려 문명권으로 정착된게 아님은
누누히 말해도 이해를 못하는지 억지성인지.>
금사 제대로 공부해보세요. 이건 단순히 한명의 혈통적 황족개념이 아니라
고구려문명권이 이후 발해로 이어지고 고구려 문명권의 연장(발해)의 곤고
한 도시문명은 요 특히 금나라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주도해서 세운 나라임.
도시문명이나 수도 설계,총지위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나 심지어 금나라 황
제 옹립과 폐위까지 고구려인 손에서 전성기와 막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금사는 엄연히 이들 유명인들에 한결같이 동명성왕의 후손으로 분명
히 못박고 있고.
조선시대로 오면서 아골타의 후손인 누루하치가 이후 후금을 세우고 다시
명에 성명학상 수극화의 원리로 청으로 국호를 개칭하는데 하여튼 이시기의
후금과 금사시기의 금나라의 문명은 상황을 달리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금나라 시기에는 여전히 만주일대는 고구려인들의 군사적
정치 활동과 고구려 발해부흥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여전히 반독립적 군사력을 유지했고
발해 도시권안에서 생활하거나 피박을 받았기에 저항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
임.
이런 총체적 문명권적 생활상은 보지 않고 애써 결론적 정치적 화두로 학
문적 내용을 재단하려는 취지들로 애써 역사를 말아먹고 캐막장질 하고 있
는게 짱개국이고 이러니 금나라로부터 송나라를 지키려고 온몸을 다바친 충
절의 악비가 역적이 되는 코메디같은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금사는 좀더 연구해 볼 가치가 분명 있는 역사이고 당시 남송과도 대결 국면
으로 청사와는 달리 더욱 뚜렷한 내외치의 개념을 가지고 정복활동을 벌였
던 상황에 고구려인들의 문명과 정치 주도하에서 일어난 상황이라
청사와는 시대적 환경적 문명적으로 어느 정도 개념은 정립하고
연구와 이해들이 필요한 상황임을 밝히며 간단히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