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편사(偏師)를 가지고 두 나라 군사를 당하게 되니 존망(存亡)을 알 수가 없다. 또 만일 망하게 되면 반드시 처자(妻子)가 욕을 볼 것이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낫다.”
조선시대에는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벌을 연산현동쪽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조선의 지리지를 보면 연산현이 황산군으로 결국 황산벌이 이곳임을 확인할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거대한 절이 있어야 한다.은진현을 찾으면 황산벌이 바로 들어난다.
조선시대에는 은진현은 덕은현이고 이곳이 바로 덕안도독부라고 했다.
당나라가 설치한 덕안도독부의 위치는 청나라고지도뿐 아니라 송나라시대 고지도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의 은진현이다 백제의 사비성은 덕주시이다 (여기에 대해 자료를 올려달라면 올려줄수 있습니다)
덕주시의 고성에는 왕궁유적도 남아있다.
15만호가 살던 당시 동아시아 최대도시 사비성은 지금 산둥성 덕주시고성이다.
은진현즉 덕안을 찾았으니 그 동쪽이 바로 황산벌이다.
덕안의 동쪽인 임읍현의 북쪽에 홍단사라는 큰절이 있다
게다가 사비성인 덕주시의 동쪽에는 대부분 평야지대인데 홍단사가 있는 곳에는 작지만 산이 있다. 바로 이산이 황산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사비성이었던 덕주시는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충지이다. 이곳을 당군은 고대 황하를 따라 서쪽에서 진격하고 신라군은 천진부근에서 계속 남하하여 임읍현의 북쪽인 황산벌로 들어온 것이다. 신라군은 당군과 합세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비성의 남쪽길을 택한 것이다. 왜냐면 군량을 그들이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백제 멸망의 이유를 풀어 보겠다 (의자황제가 미친 캐똘아이라서 망하게 됬다는 소린 그만하길)
顯慶二年,詔仁貴副程名振於遼東經略,破高麗於貴端城,斬首三千級。明年,又與梁建方、契苾何力於遼東共高麗大將溫沙門戰於橫山,仁貴匹馬先入,莫不應弦而倒。高麗有善射者,於石城下射殺十餘人,仁貴單騎直往沖之,其賊弓矢俱失,手不能舉,便生擒之。俄又與辛文陵破契丹於黑山,擒契丹王阿卜固及諸首領赴東都。以功封河東縣男。
구당서
657년 설인귀에게 요동경략을 명했다. 고구려군을 귀단성에서 이겼다. 3천명을 참수했다. 다음해인 658년 양건방 계필하력은 고구려군 대장군 온사문을 황산에서 맞아 싸웠다. 고구려군에는 명사수가 있었는데 석성아래에서 당나라군 수십명을 화살로 죽였다. 설인귀가 단기로 돌진하여 고구려군의 활을 부러뜨리고 그들을 생포했다. 또 신문릉은 흑산에서 거란과 교전했는데 거란왕아토고와 여러 수령들을 잡아 낙양으로 보냈다. 그 공으로 신문릉이 하동현남작이 되었다.
○ 고종(高宗) 영휘(永徽) 4년
(653년) 장군(將軍)
신문릉(辛文陵)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를 위무(慰撫)하였다. 행군하여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 고구려 군사가 이들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위대가(韋待價)가 중랑장(中郞將)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조서를 받들고 동쪽 변경을 경략(經畧)하고 있었는데, 이를 인해 부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
신문릉이 악전고투하자, 고구려 군사들이 점차 후퇴하여 보전할 수가 있었으며, 위대가는 중상을 입었다.
《구당서》
653년에 설인귀와 신문릉등이 고구려를 공격했을때는 당나라가 대패했다.그러나 657년과 658년의 전쟁에서는 설인귀와 신문릉이 고구려와 거란연합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거란은 수나라 개황(開皇) 말기에 부족이 점차 불어나자, 목축을 하기 위해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요서(遼西) 2백 리 되는 곳에 이르러 회흘(回紇)에 의지하여 살았다. 당 태종 정관(貞觀) 22년(648)에 추장인 굴가(窟哥)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하자, 당 태종이 거란부(契丹部)를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만들고 굴가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송막과 요락(樂樂) 지방을 통치하게 하였으며,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성(新城)에서 고구려와 싸운 것이다.《東史綱目 第4下》
거란은 원래8부라고 하며 병력이 4만명이 조금 넘는다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다.648년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할때 일부 거란부족이 당나라에 항복했고 이들이 당나라의 변경을 지키게 된다. 그 추장은 이굴가이다.657년의 거란왕아토고는 고구려의 편에 선 거란족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남은 거란족의 왕으로 보인다.
初,涼州界有回紇、契苾、思結、渾四部落,代為酋長,君?微時往來涼府,為回紇等所輕
구당서
량주 경계에 회홀이 있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전쟁이 끝난뒤 구당서에는 고구려와 경계가 령주라고 쓰여있다. 즉 당시 거란족과 해족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바로 광개토호태왕이 점령한 염수가 있는 염주일대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회홀부족을 동원했는데 회홀부족이 고구려와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동원된 것을 알수 있다. 호태왕때 고구려가 오손즉 지금 카자흐스탄동부까지 진격했으나 문자태왕말기에 돌궐의 발흥으로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밀리고 돌궐이 거란과 회홀부족의 상국이 되었다. 그러나 돌궐이 분열되고 당에 망한후 연개소문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상당한 영토를 수복했는데 회홀근처까지가 연개소문의 수복한 영토였던 것이다.수서에 쓰인 고구려가 동서6천리라는 것은 북위가 동서 5천리정도라는 기록으로 보았을때 동쪽기준은 고구려와 북위가 모두 백제이고 서쪽은 북위는 룡우이고 고구려는 회홀이 있는 량주근처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660년 나당연합군 18만이 백제를 침공할때 고구려가 그동안 지켜왔던 당에 대한 우위에서 약세로 전환되는 듯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계속 이기다가 657년과 658년 패하고 고구려의 동맹군이자 한쪽 날개인 거란은 왕까지 포로로 잡혔다.
추7월 고구려 평양하(平壤河)의 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물들었다.
○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지금 연산현(連山縣) 동쪽 4리에 있다 으로 진군하니 백제에서는 장군 계백(階伯)을 보내어 막게 했다
경신년 신라 태종 7년, 고구려 왕 장 19년, 백제 왕 의자 20년(당 고종 현경 5, 660) 동사강목
나당연합군 18만이 백제와 싸우고 있는 와중에 고구려는 지원군을 마땅히 보내야 하는데 보내지 못한다. 그 이유가 위에 있다.
강물이 피처럼 붉어지는 것은 화산폭발,지진 혹은 내전으로 인해 강근처에서 병사들이 대거 죽었을 경우이다. 연개소문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쉽게 당하지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보다 인구도 더 많은 나라였으니 말이다.
중국 화산대와 지진대분포
붉은원은 지진,초록색은 화산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국내성인 베이징과 고구려의 평양성인 현재의 베이징시동남쪽 향하현일대는 지진과 화산대이다.특히 평양일대는 바로 화산대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곧바로 백제를 돕지 못한 것은 첫째로 백제의 국력이 18만명의 적군정도는 극복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둘째 수도에 화산폭발로 인한 일종의 피해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지진 화산폭발같은 대규모 자연재해에 크게 두려워하고 지도자가 정치를 잘못해서 하늘이 내린 징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수도인근에서 화산이 폭발하자 연개소문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는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2월 왕도의 우물물과 사자하(泗泚河)가 피처럼 붉었다
서해(西海) 가에서는 물고기 떼가 죽었는데 백성이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였고, 또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기도 하였다. 왕도의 백성들은 누가 잡으러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서로 놀라 달아나다가 넘어져 죽은 자가 1백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것도 헤아릴 수 없었다. 또 검은 구름이 마치 공중에서 용이 싸우는 형상을 하기도 했고, 사슴 같은 개가 사자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기도 하였다. 왕도에 있는 개들이 길에 모여서 혹은 울고 혹은 짖으며, 어떤 때는 귀신이 왕궁에 들어와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하리라
경신년 신라 태종 7년, 고구려 왕 장 19년, 백제 왕 의자 20년(당 고종 현경 5, 660)동사강목
같은해 비슷한 기록이 백제에도 있다. 백제 역시 화산혹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 피해가 꽤 컷음을 짐작할수 있다. 그럴경우 민심이 크게 이반되는데 이때 또다른 기록이 있다 바로 용이 싸우는 형상을 기록한 것이다. 용이란 대대로 황제를 뜻하니 이는 황제자리를 놓고 왕자들이 내란을 일으켰음을 짐작할수 있다.삼국사기에는 의자황제에게 둘째아들은 부여태이고 셋째아들은 부여융이라고 기록이 있으며 부여효는 몇째아들이라는 기록은 없으나 장남으로 보인다. 의자황제가 즉위 4년에 삼남인 부여융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사비성이 당나라군에 포위될때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변경으로 도주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어느 시기에 태자가 바뀐 것이다. 그 시기가 내가 보기에 바로 백제가 나당연합군 18만의 침공을 받기 몇달전으로 보인다. 지진혹은 화산폭발로 인해 수도 사비성(산둥성 덕주시)일대가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부여 효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부여 융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내란을 벌여 이긴 것이다. 백제는 망하리라 라는 말이 수도에 돌았다고 하는데 비슷한 기록이 고구려에도 있다. 고구려말기에 태자자리를 두고 내란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로 망명한 승려가 고구려가 곧 망할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태자자리를 두고 내분이 일어날경우 백성들이 나라가 망할징조라고 생각했음을 알수 있다. 흉노와 돌궐이 망한 것도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내분때문이었다.
河東地震,晉州尤甚,壞廬舍,壓死者五千余人。三日又震。詔遣使存問,給複二年,壓死者賜絹三匹。
구당서 649년
하동에 지진이 났다. 진주가 더 심했다. 깔려죽은 사람이 5천명이나 된다. 죽은 사람에게 비단 3필을 주었다
晉州地震
구당서 650년
진주에 지진이 났다
晉州地震
구당서 651년
진주에 지진이 났다
일본지진의 경우를 보니 같은 지진대에 속할경우 한쪽 끝에서 지진이 나면 반대쪽끝도 결국에는 시간차를 두고 지진이 나는 것을 알수 있다. 구당서에 649년의 대규모 지진은 당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태종 이세민은 그 해에 죽으면서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고 유언한다. 5천명이나 죽은 대지진에 왕으로서 책임을 느낀 것이다 아마도 하늘이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 노했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진의 진행방향이 계속 동쪽으로 이어짐을 알수 있다. 하동다음에 진주가 계속 지진이 났는데 그 동북쪽은 고구려와 백제의 땅이기 때문에 당나라가 기록이 없는 것이다. 이 지진대는 장안,하동,진주에서 백제의 사비성인 덕주시와 고구려의 평양인 베이징시 동남쪽 향하현일대까지 이어진다.
백제가 같은해 2월에 먼저 강이 피빛으로 변하고 고구려가 7월에 강이 피빛으로 변했으니 충분히 근거가 있음을 알수 있다.
결국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을때 백제는 몇달전에 지진피해로 수도 사비성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고 민심이 크게 이반된 상황이었으며 내란으로 인해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 효로 바뀌었다. 즉 귀족들사이에 큰 세력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17년 봄 정월,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삼국사기 의자왕
657년 의자황제가 무리수를 두었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황제가 적자도 아닌 서자를 그것도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땅을 나눠주었으니 기존 귀족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황제의 권력은 강화되었겠지만 귀족세력은 당연히 축소될 것이다. 의자황제가 잦은 신라침공을 한 이유도 어찌보면 국내귀족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봐야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귀족들이 기존 태자인 부여융대신 장남인 부여효곁에 모여들어 기회를 노린 것이 아닐까?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의자왕
만일 백제군이 고작 5만명정도였고 백제가 완전히 멸망직전이었다면 18만명이나 되는 적군이 쉽게 물러갈지도 모른다고 부여 효의 아들 문사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에 이미 백제 전역에서 구원군이 수도 사비성으로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한다.그러니 당나라군사가 물러나면 우리 목숨은 숙부인 부여태에게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적군보다 오히려 반란을 일으킨 숙부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태자도 아니었던 부여태가 쉽게 왕이 되었던 것은 의자황제의 아들들이 모두 엄청난 땅과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의자황제가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왕자들의 사병보유를 관대하게 허용했고 그 사병의 수도 이전황제때에 비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런 조치는 기존 귀족세력들이 황제에 대한 반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구당서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끌고 항복하러 왔다.
가장 어이없는 일은 바로 웅진성주 예식이 의자황제를 포박한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는 웅진성주의 반란으로 어이없게 당나라의 포로가 된다.기가 막힌 일이다. 의자황제가 억압하려했던 기존 백제 8대 귀족도 아닌 기원도 불분명하고 인구도 적은 예씨성의 성주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이다. 웅진성주라면 상당히 고위직인데 8대귀족이 아닌 이를 임명했으니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을 것이다. 단순히 매국노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혹 그가 부여융의 지지세력이었다면 설명이 가능하다. 부여융은 왕자들중에 앞장서서 항복한 대표적인 황족이다. 그는 나중에 대방군왕으로 임명되어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백제부흥군을 토벌하러 오기도 한다. 부여융과 예식진은 모두 고구려의 연남생처럼 매국노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禰)라는 성씨는 기록을 뒤져보니 우리쪽 문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성씨이다. 한나라때 예씨라는 성을 가진 인물이 몇몇 등장한다.백제가 진나라를 침공하면서 백제에 들어온 성씨가 아닐까 한다. 이런 경우가 또 있는데 특히 백제 8대귀족인 국씨의 경우 원래 전국시대 제나라의 귀족의 성씨였다. 예씨를 중국쪽 자료를 뒤져보니 출처미상의 소수의 성씨이다라고 되어있다. 지금도 예식의 후손들이 중국에 있기는 한 모양이다
分為五部,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部有五巷,士庶居焉。部統兵五百人。五方各有方領一人,以達率為之,方佐貳之。方有十郡,郡有將三人,以德率為之。統兵一千二百人以下,七百人以上。城之內外人庶及余小城,鹹分隸焉。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
북사 백제전
5부가 있는데 각부는 5백명을 통솔한다. 5방에는 각각 방령1명이 있다. 달솔이 겸한다. 각 방에는 10군이 있다. 각군에는 3명의 장수가 있는데 덕솔이 겸한다. 병사를 7백명이상에서 1천2백명이하를 각 통솔한다. 그 땅에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도 있다.
백제는 1명의 장수가 약 천명을 통솔하며 1개군에 3명의 장수가 있고 50군이 있었다 .즉 지방군의 규모가 15만이다. 고려시대 지방군인 광군이 30만 중앙군 40만을 합쳐 총 70만이라는 고려도경의 기록을 보면 백제역시 중앙군을 포함했을 경우 최소 30만임을 알수 있다.최소 30만정도 되니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쉽게 물리친 것이다. 백제가 망할때도 의자황제는 2백개성에서 출병할 수십만의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이 없게 웅진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고 만다.
백제 멸망은
1.나당연합군침공몇달전에 큰 지진으로 수도일대의 피해가 크고 민심이 크게 동요된 상태였고
2.왕자들의 태자를 둘러싼 내분으로 패한 쪽의 귀족들이 제 살길을 도모해서 병력지원을 느리게 한 까닭이고
3.왕자들이 막대한 군권과 영토를 쥐었기에 귀족들이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의자황제에 협조를 하지 않으려 한 상태였고
4.원병을 보낼 고구려가 역시 지진혹은 화산폭발로 구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5.기습을 감행한 당나라군의 전략이 훌륭했으며 신라군역시 당나라군 못지 않게 강하게 백제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강병이 1백만이었고 유주 연주 제국 노국 오국 월국을 차지하여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다라고 한다. 백제 보다 훨씬 약한 후백제는 호북성 무한과 개봉성을 포위공격함으로써 백제의 옛영토를 수복하려 했다. 백제가 망함으로써 당나라는 그제서야 한나라이후 중단되었던 태산봉선제를 재개했다. 개봉일대의 진류군은 당나라중반기가 되자 옛 한나라때의 인구를 회복했다.
대당평백제비에는 소정방이 쓰길 백제는 호수 25만호에 인구 620만이라고 했다.삼국사기에는 76만호라고 하니 총인구수는 1860만가량이다.백제는 북사에는 50군이 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멸망할때 37군이라고 했다. 최고 전성기인 근초고,근구수황제때는 그 인구와 영토가 더 컷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