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두건을 쓰고 흰 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군인들이 백두산 천지 옆에서 두 손을 합해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다. 흰옷을 입은 사람 앞에는 쇠말뚝으로 보이는 것이 땅에 박혀 서 있고 그 위엔 무언가 놓여있다. 이 사진을 발굴한 측은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일본군 용산주둔 18연대 대원들과 일본인 식물학자들로 구성된 백두산 탐구 등행대가 천지에서 목욕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진을 통해 일제가 우리나라 중요한 혈맥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속설이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을 처음 실은 '주간조선'측은 이 사진이 백두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사진만으로는 쇠말뚝을 박았는지의 여부는 명확치 않다. 주간조선은 다음호에서도 당시 백두산에 오른 일본군 일행가운데 한국인들도 있었으며, 이 행사는 일본의 '신도텐코쿄(神道天行居)'라는 종교단체에 소속된 남자무당이 제사를 주관했다고 후속보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이 일본 신도의 무당을 모시고 백두산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다만 이것이 쇠말뚝을 박은 증거라고는 말하기가 주저스럽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일제가 우리나라의 높은 산마다 꼭대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일제 강점기 때 이야기는, 우리들이 일제의 '만행'을 상기할 때에 신사참배나 창씨개명과 함께 거명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의도적으로 행해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주간조선'이 '일제의 쇠말뚝박기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1995년에 나온‘월간조선’ 10월호는 쇠말뚝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風水정권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월간조선’은 95년 당시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쇠말뚝 제거사업과 일제가 개악한 고유지명 찾기 등 정부 주도로 벌이는 민족정기회복사업을 비난하고, 일제시대 일본의 측량기사를 따라다녔다는 당시 78세인 이봉득씨의 말("주민들이 박은 측량용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을 예로 들면서 “김영삼 정부가 풍수적 매카시즘으로 국민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역사학자 이이화씨도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래서 이를 믿는 사람들이 쇠말뚝을 뽑아내는 일에 나섰다. 헌데 이 말은.... 근거가 없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대학 조규철 교수도 '일제의 쇠말뚝 박기'주장은 한국 국민이 갖고 있는 피해 의식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풍수설'에 의한 '지맥' '혈맥'의 사상을 '민족의 정기'에 연결시킴으로서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했다"는 주장으로 민족 감정을 고양시켜왔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산에서 뽑아낸 말뚝은 모두 30센티 전후의 것으로, 보통의 사람이라면 표고 수백 미터이상의 일 미터 전후의 쇠말뚝과 게다가 불과 30센티 정도의 쇠못(?)을 박았다고 해서 과연 '지맥'과 '기맥' 또는 '민족의 정기'가 단절되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며 이것이 상식이지만 이 문제가 '일본' 또는 '일제(라는 과거)'의 것이 되면 이 상식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도 매스컴도 여론도 '반일'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시야 편협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즉각 반발을 불러왔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 30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고 반박했다. 또 10여 년 전부터 일제가 박은 풍수침략용 쇠말뚝을 제거하는 일을 해오던 소윤하씨 (민족정기선양사업단)는 “현장 탐사를 해보지 않은 책방 서생의 일방적 편견”이라며 이씨를 강하게 비난했다. 소씨는 “일본인들이 측량용으로 표시한 것으로 의심되는 쇠말뚝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아놓은 쇠말뚝임이 분명함은 현장이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또 1941년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신세우씨(1988년 작고)의 증언도 의미가 있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경력으로 징용된 후에 일본군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통역관 역할을 하게 된 신 씨는 미군에 패한 뒤에 야마시타와 함께 필리핀 다바오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종전 뒤 벌어진 전범재판 때도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한반도 산 곳곳에 혈침(穴針)을 박아놓았다는 것과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일대에서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신씨는 아들 동식씨(54·동양양생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부자가 전국을 돌며 혈침을 제거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덕궁 인정전 뒷산에 있던 석침의 존재도 알려졌다. 야마시타가 선친에게 일러준 장소를 확인한 동식씨는 97년 5월5일 관할 구청의 허가를 받아 굴삭기로 땅을 파보기로 했다. 지하 18m를 파들어가 보니 과연 석침이 있었다. 문제의 석침은 모두 7개였고,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견고한 화강암재 석침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인공 화강암이 들어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씨는 혈침을 제거하러 다니는 동안 일제가 매우 악랄하게 풍수침략을 자행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바위에다 5~6m 깊이로 쇠말뚝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은 다음 끝이 화살표처럼 생긴 쇠말뚝을 박아 빠지지 않게 했고, 또 틈새에는 석회까지 발라 단단하게 굳혀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쇠말뚝이 어떻게 토지 측량용이 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충무공 묘소와 세종대왕릉, 퇴계 이황 선생의 묘지에서 식칼과 쇠말뚝이 잇달아 발견됐고, 이것이 무속인 양순자씨 모자가 한 것이라는 사실이 경찰조사로 드러나면서 '일제의 쇠말뚝 박기'는 다시 혼란에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측량용 쇠말뚝과 풍수침략용 쇠말뚝은 그 생김새나 사용 방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교란용이라는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 지형 측정을 위해 삼각측량(대삼각지점)을 할 때 산 정상 근처에 조표(造表)를 만드는 과정에서 망루를 고정시키기 위해 큰 못이나 쇠말뚝을 박는 경우가 있으나 그럴 경우에는 쇠말뚝 끝에 고리가 있거나 표석(標石)을 중심으로 빙 둘러 말뚝을 박기에 최근에 발견됐다고 신고되는 쇠말뚝과는 모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충북 단양의 향토사학자 윤수경씨는 10여 년 전부터 단양군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 현장들을 찾아다녀 쇠말뚝을 박았다는 곳을 무려 81개소나 찾아냈는데, 혹시 쇠말뚝이 박힌 장소들이 ‘측량 삼각점’은 아닌가 하여, 군청 지적과 직원들의 도움을 구해 측량 삼각점과 대조해 보았으나 측량 삼각점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음을 밝혀냈다. 게다가 윤씨는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을 정밀지도에 꼼꼼히 표시하면서 그것을 풍수학에서 중요시하는 지세도(地勢圖)에 비교해본 결과,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이 대개 풍수상의 중요 혈처(穴處)였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제의 의도적인 풍수교란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정황이나 방증은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