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도 썻지만 다시 쓰겠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여 언제나 사적을 따라 다니게 된 까닭이다. (열하일기 도강록)
이덕일(1961년 10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작가, 언론인, 대학교수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 출신으로, 대한민국 학계에서 정설이지만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어왔던 이슈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관련 사료를 제시한 30여 권의 역사비평서를 집필하였다. 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학설을 주장하여 유사역사학자라는 평가를 듣는다.
낙랑 평양 위치설이 이병도에서 시작됬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 할 순 없을까요... 물론 조선시대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많이 비정되어 졌죠. 실제로 정약용도 한사군을 한반도로 비정했고요.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학자들마다 한사군 위치를 다르게 비정했지요. 이익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비정했고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여 언제나 사적을 따라 다니게 된 까닭이다. (열하일기 도강록)
낙랑군 설립후 60년후에 인구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국계 15%에 원주민계 85%정도로 나옵니다. 이때까지는 따로 조사한걸로 봐서 중국계하고 원주민계하고 융합이 안되었다는것을 보여주죠. 하지만 낙랑의 존재기간이 수백년이고 그 후로 중국으로 부터 특별히 대량의 이주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는걸로 봐서 얼마안가서 두 민족이 통합되었을게 거의 확실합니다. 이럴경우 낙랑이 중국의 역사냐 한국의 역사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원주민계고 그후 고구려에 통합되므로 낙랑 역시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는게 더 타당합니다. 낙랑을 중국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라고만 보는건 너무 편협한 역사 인식이죠.
보통 낙랑의 대동강 유역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곳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냥 싫은거죠. 이유는 위에 썼듯이 낙랑을 중국의 식민지라고만 보고 위대한 우리 민족의땅 한반도에 중국의 식민지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다..라는 거죠.
2차대전 이전 일본인들은 선조들이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걸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유래론, 중국 유래론, 남방 유래론을 모두 부정해놓고(이렇게 부정하는건 쉽습니다. 위에도 어느분이 중국식 성이 발견안되니 한사군은 없었던거다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죠.) 일본인은 일본 열도에서 창조되었다라는 주장을 진지하고 강력하게 했었죠.
1. 혹시 일제시대 때 발견되었다는 낙랑 유물들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요? 적어도 님이 우리가 수천년동안 낙랑 유물 하나도 발견 못했을 때 1923~1924년 단 1년만에 낙랑 유물 600여기가 갑자기 발견 된 것을 전부 믿는.. 그런 사람은 아니길 빕니다.
2. 님이 말하는 낙랑군 유물들은 주류사학계에서도 잘 언급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평양 낙랑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퇴출당했어요
님이야 말로 기초적인 것은 모르나 보군요.
물론 고고적조사보고서에는 57기만 등록되어 있긴 합니다. 보고서에 수천개가 넘는 유물들을 다 쓸 수 없잖아요?
낙랑고분은 토성동 토성의 남쪽 지역에서 많이 분포해있고 일제시기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석암리,오야리,토성리 및 남곤면 남정리 등에 해당하며 현재는 평양특별시 낙랑구역에 속합니다.. 해방 이전 일본인이 개략적으로 조사하였을 때에 2,000여 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현재까지 정식적으로 발견된 유물만해도 1300여기인데 무슨 70여기 참ㅋ
2007년 4월 14일 충남대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제 95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에 따르면 현재까지 3000여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까지 했어요
이분 일부러 못알아듣는 척 하는 건가요ㅋ
1923년 세키노조사이후 1924년까지만 해도 낙랑고분이라고 하는 위작들이 총 600여기의 낙랑고분이 발견된 것은 빼도박지 못할 사실이에요. 일제시대 때 낙랑유물 추정치가 2000여기라니깐요? 그 중 57기가 고고적보고서에 들어간 것이고요
낙랑에 관해서 한가지만 더 말하고 샆은건,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지가 해방후에 북한에서 발견된것만수천기라서 더이상 평양과 낙랑의 연관성을 부정하는게 불가능하다는것과 함께 낙랑은 엄연히 우리의 역사로 봐야한다는 점임. 다음의 기사를 읽어봐주면 좋겠음. 개인적으로 낙랑에 대해 가장 잘쓴 기사로 생각함.
간단히 두산백과 링크정도로도 객관성을 어느정도 입증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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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채택 및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가기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북아역사재단 [東北亞歷史財團] (두산백과)
2005년 3월 7일 대통령 노무현이 역사왜곡과 독도문제를 장기적·체계적으로 전담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설립될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재단이다. 2006년 5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2006년 8월 20일부터 시행되는 동북아역사재단설립운영법에 의하여 9월 28일 출범하였다. 2004년에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도 이곳에 흡수 통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북아역사재단 [東北亞歷史財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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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검색해보니 나오네요 국가기구라는데요
제가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없습니다' 님이 걸어준 링크를 보고 이해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대 의견은 다른분이나 님이 댓글로 적어준 내용을 보고 대충 정리했습니다
제가 들고온 새로운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위에서 적어오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내린 판단이라는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바는 어떤 반박가능한 패러다임을 제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미 위에서 제시된 바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미 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없습니다'님이 걸어준 링크라고 수차례나 말씀드리고 있는데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시니 이해할 의지가 없거나 또는 이해할 능력이 없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없습니다"가 이덕일 학자를 유사역사학자로 폄하한 위키백과글을 근거로 들었는데 거기는 식민빠들이 목숨걸고 사수하는 곳입니다. 반식민사학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반식민사학적 학설들은 거기에 상주하는 식민빠들이 아주 대놓고 왜곡하여 당연히 아주 악의적으로 의도적으로 나쁜 쪽으로 편집합니다. 뜻있는 분들이 위키백과에 많이 진출하셔서 거기 식민빠들과 많이 싸우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