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대일기'(支受大日記)는 일본 육군성(陸軍省)이 1938년 3월 4일 작성한 문건으로 일본군대의 위안소제도 설립의 기초가 되는 걸로 평가됩니다. 위안부를 모집하면서 소란이 일자 '군의 위신에 영향을 미치니 헌병·경찰 당국과 긴밀히 협조하고 사회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위안부는 일본군 부대에 꼭 필요하므로 위안부 경영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라'는 내용이 적힌 도항증(渡航證)
버마(Bamar) 만달레이(Mandalay) 주둔지 사령부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부 사용 시간 및 사용 요금표.
「스마란 사건」 판결문. 일본이 인도네시아 스마란에서 운영한 '사쿠라 클럽'(Sakura Club)에서 일본 헌병대의 관리 아래 여성들을 급사로 모집한 뒤 강제 매춘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군법회의 판결문. 왼쪽 상당에 손글씨로 '강제 매춘'이라고 적혀 있다. 본 사건을 「스마란 사건」이라 불린다. 피고는 노자키 세이지(野崎清次)
피해자 잔 러프 오한(Jan Ruff-O'Herne)의 증언(1923년 자바섬 태생의 네덜란드인)
나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의 스마란시 근교에서 자랐습니다. 경건한 카톨릭 교도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에는 수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42년에 네덜란드군은 일본군에 항복하고 우리는 억류소에
넣어졌습니다.
1944년 2월, 여성과 아이가 들어가 있던 억류소에 일본군이 와서 나를 포함한 16명의
아가씨를 골라 트럭에 태우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시치카이테이(七海亭)」이라고 불리는 집에 데려 갔습니다. 방에 들어가 떨고 있자 일본병이 와서 군도를 들이대고 나를 강간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일본병은 줄을 지어 와서 매일 우리를 강간했습니다.2개월 정도 지나서 돌연 위안소가 폐쇄되었습니다. 일본병은
「위안소에서의 일은 이야기하지
마라. 이야기하면 가족도 죽이겠다」라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침묵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주위 사람으로부터는 「일본의 매춘부」라고 멸시받아 괴로웠습니다.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쿠라 클럽」의 경영자 아오치 다카오(青地鷲雄)가 영업하고 있던 「아케보노 식당」 2007년 3월 28일에 공표된 국립국회도서관 소장의 신편야스쿠니 신사문제 자료집(靖国神社問題資料集)에서 위안소 경영자가 합사되고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는 「사쿠라 클럽」을 경영하고 있던 아오치 다카오로 바타비아 임시군법회의에서 금고 10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아오치는 일본군 점령 후 얼마 안 되어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아케보노 식당」을 개업. 그 후 일본군정감부로부터 일반 일본인용의 위안소 개설을 지시받아 「사쿠라 클럽」의 영업을 했다. 여기에 넣어진 네덜란드인 여성들은 감언이나 협박에 의해 모집되어 「매춘」을 강제당했다. 그 중에는 14세 소녀도 있었다. 사진은 네덜란드 NRC 한데르스브랏트지(1992.8.8)에 게재된 「아케보노 식당」의 기념사진. 왼쪽의 간판에 「군지정 시영 간이식당」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