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정권을 잡은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 후금과의 외교를 끊었고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였던데다 더 큰 원인이라고도 볼수있는 극악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있었던 경제적인 문제도 겹치는 상황인지라 이를 타개함과 동시에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 진입을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조선에 대해 온건하던 태조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태종 홍타이치 는 이런 여건들로 인해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l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참고로 정봉수라는 사람이(민간신분)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항전은 나름 당하기만 한 전황상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이립이 의병을 모아 적의 진격을 늦추었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정묘조약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
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전쟁 이후 ¶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시켜 가도의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고 지역 등 근처 유목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결국 이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흑역사를 남기고 만다.
https://rigvedawiki.net/w/정묘호란
가도사건(모문룡)
가도사건은 1621년(광해군 13) 후금[後金. 훗날 청(淸)]에 쫓긴 명(明)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한 이후 조선-명-후금 사이에 일어난 사건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모문룡의 군대가 가도에 주둔한 것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해서 온 것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아무리 밤이 깊다 하더라도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 관련 비상사태를 담당했던 임시 기관. 훗날 가장 강력한 상설기관이 된다)를 소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광해군일기』 중초본 167, 1621년(광해군 13) 7월 25일 갑자 3번째 기사]을 비롯해 후금과 명에 사람을 보내서 두 나라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후금 견제를 목적으로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허락했다.
모문룡의 입장에서도 후금을 견제하고, 조선과 후금이 연합하는 것을 견제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가도에 주둔했다. 또한 지상전에 비하여 해전(海戰)에 약한 후금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모문룡과 인조반정 이후였다.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대부분인 가도 주민들을 모두 군대로 편입시켜서, 농사와 군사 훈련을 병행시켰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후금을 급습했다.
후금에게 모문룡의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동시에 모문룡을 지원하는(지원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후금의 입장에서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1627년(인조 5) 조선이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받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이 조선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모문룡이 군인 본연의 일만 했으면 좋았겠으나, 모문룡은 갖가지 이유로 지속적으로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조선 조정은 사대(事大)에 입각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강요받았고,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로 군량 제공을 하지 않았으나, 인조가 등극하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량 제공은 1623년(인조 1)이 돼서 시작됐다.
즉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집권 이후 모문룡의 주둔 비용을 조선 조정이 부담한 것이다.
또한 조선 백성들이 후금을 지원했다는 핑계로 평안도에 상륙해서 조선 백성들을 구타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의 군대인 모문룡과 그 군사들의 악행에 조선 조정과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어쩌면 할 생각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조와 조정이 조선의 백성을 모문룡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만 문제가 아니다.
기울어져가는 명과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그 사이에 낀 조선에서는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신중한 중립 외교를 펼쳤으나,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는 성리학의 화이(華夷)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친명반청, 즉 명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외교를 펼쳤다.
이것도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함께 조선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됐다.
결국 모문룡은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모한 전투를 일삼아 실패를 거듭했다는 이유로 명의 조정에서 파견된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당했다.
모문룡에 대한 평가와 그의 악행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남아있다.
모문룡은 남쪽 지방의 사람이다. 요양성(遼陽城)이 함락될 때 탈출하여 여순(旅順) 어귀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나와 의주 주위에 기거하면서 견제의 계책을 하였다. 처음에는 세력이 고단하고 미약하였으나, 가도(椵島)로 들어가 웅거하면서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노적[奴賊-여기서 노적은 후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들이 동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요동의 백성 2, 3십만 명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조정을 속여 해마다 황실의 은(銀) 20만 냥을 끌어내었다. 그러나 암암리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무리들과 결탁하여 내당(內璫-황후나 후궁의 거처를 의미함. 필자주.)으로 들여보내고, 가도에 필요한 식량은 우리나라에 부담시켰다. 그들은 거짓으로 첩보를 올리고 심지어는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 전벌의 공적을 떠들어댔다. 외로운 섬에서 칩거하면서 위세부리는 것만 일삼았으나, 공상(功賞)은 더해져 벼슬이 후군 도독(後軍都督)에 이르렀다. 무진년(1629, 인조 7)에 이르러, 원숭환이 명을 받고 산해관을 나와 그 진상을 알고는 쌍도(雙島)로 불러내어 베어버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167권, 광해군 13년 7월 26일 기사.
이 기록에 따르면 모문룡은 조선은 물론이고, 명의 조정과 내시들에게까지 촉수를 뻗치고 뇌물을 바쳐서 그 지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이 인조반정 직후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조 집권기에도 모문룡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