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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22 01:09
[한국사] 고구려는 낙랑군과 313년까지 함께 평양에서 살았다 ?
 글쓴이 : 도배시러
조회 : 1,631  

삼국사기 고구려

247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평양성 천도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誤讀史記朝鮮傳) 동천왕 평양 왕검성

302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미천왕
병사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인을 노획하여 평양으로 옮겼다

311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 遼東 西安平
313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여 2천여명을 잡아왔다.
314 十五年 秋九月 南侵 帶方郡
315 十六年 春二月 攻破 玄菟城 殺獲甚衆

학계 통설은 313년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으로 낙랑군 평양을 멸망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그 이전에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환도성을 난도질 당한후

247년 평양성을 축성 하고 종묘사직을 옮겨서 도성을 (낙랑군)평양으로 옮긴 것은 뭘까 ?

대대적으로 종묘사직 廟社 을 옮기는 도성 천도는 이때가 처음이다.

그리고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 하기에 앞서서 

302년 현도군 침략후 노획한 8천인을 (낙랑군)평양으로 옮기는 동안 같이 살던 낙랑군은 대체 뭘 한걸까 ?


학계 통설을 따르자면...

낙랑군과 고구려는 평양에서 함께 살았다고 봐도 되는걸까 ?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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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7-12-22 06:31
   
동천왕의 평양성은 고조선의 왕검성이고, 장수왕의 평양성은 고조선과 딱히 연관이 없다 ?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 =  동천왕의 평양성은 어디인가 ?
칼리S 17-12-22 07:34
   
247년 동천왕이 평양천도를 계획했지만, 아마 실현 못했을 거라고 봐야죠. 고대사회에서 수도 이전은 기존 지배세력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라 반대가 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동천왕은 다음해에 사망했고, 그 이후 기사를 봐도 다시 환도성이나 국내성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도 없을뿐더러 고구려의 수도는 장수왕의 천도 이전까지 쭉 같은 곳이었죠. 오히려 장수왕의 평양천도가 된 사유가 동천왕때에 조성된 걸 기반으로 왕권강화와 맞물렸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미천왕대에 낙랑과 대방을 공격해서 완벽히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온 것인데, 이는 중국세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세력을 굴복시킨 겁니다. 애당초 중국 본토에서 그 먼 낙랑이나 대방지역까지 직접지배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죠. 한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형식적이었고, 후한말이나 삼국시대처럼 통치력이 개판인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랬죠. 애당초 낙랑지역(현 평양)은 중국의 직접지배가 아닌 토착유력자들에 대한 중국의 형식적인 관작수여로 지배되었겠죠. 토착유력자들도 당연히 중국의 관작은 탐이나는 것이고요. 이는 우리나라 삼국 모두 마찬가지죠.

동천왕 시대 말기에 평양으로의 천도계획은 낙랑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확장되었던 것이죠. 어차피 낙랑이나 대방지역에 중국왕조의 힘은 사실상 못 미친다고 보고, 그 지역 토착세력을 굴복시켜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낙랑이  평양이 중심지였다고 해서 평양이 고구려의 수중이 들어갔다고 없어진건 아니죠.

미천왕조의 기사에서 남쪽의 대방군만 해도 고구려 남쪽의 대방군이면 어느 지역이겠습니까? 낙랑잔존세력과 대방지역을 미천왕 시대의 고구려가 완전히 굴복시켰다로 보는게 맞습니다.

평양지역은 현재의 평양이 맞고, 이는 고려, 조선시대 쭉 우리 조상들이 인식해 온 사실인데, 이걸 부정한다고요? ㅋㅋㅋ.
     
도배시러 17-12-22 07:51
   
고조선 왕검성 = 동천왕 평양성 = 낙랑군 평양 인가요 ?

동천왕 평양성은 평양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 인터넷에 보여서 확인해봅니다.
          
칼리S 17-12-22 09:01
   
동천왕대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과 완전 일치한 지역이라고는 말 못해도, 대략 한반도 북부의 지역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사실상 한반도내의 한군현세력(사실상 낙랑)은 한무제 이후에도 직접통치는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위만조선의 멸망자체도 내부분열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토착세력의 실제통치하에 한의 명목상 지배가 이루어져왔겠죠. 그러한 토착세력들이 중국왕조나 고구려의 판도에 민감했을것입니다.

요동지역만 봐도 공손씨 세력은 거의 독자적인 세력이었죠. 아마 공손씨 일족이 그 지역의 토착지배세력이었을 것이고, 한나라도 이를 인정하면서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겠죠. 당연히 요동지역보다 먼 한반도 북부지역은 더했겠죠.

낙랑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지 않았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그럼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반도 북부지역은 어느 국가가 통치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한반도 북부에서 평양일대는 진짜 노른자 땅이 아닐 수 없는 지역이죠. 이런 노른자 땅이 공백지였을리는 만무하고 그 지역을 토착세력은 고조선 때부터 쭉 있어왔을겁니다.

요동요서지역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는 요충지였을지는 몰라도, 좋은 영토는 아니였습니다. 일단 북방 유목민족과 중국세력,  그리고 우리나라와 맞물려 언제든 전쟁이 발발하는 지역으로 좋은 입지가 아니죠. 고구려도 요동지역을 군사적 방어거점으로 삼고, 한반도 북부의 평양일대 곡창지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게 국가적으로 가장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가장 큰 요지인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이 경쟁한 겁니다. 요동 요서지역은 결코 고구려에게 좋은 영토가 아닙니다. 단지 방어적 거점기지의 확보를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죠.

고대 국가일수록 통치력은 형편없었기에, 지도에 줄 긋기식으로 넓은 영토에 환장하는건 웃긴 일입니다. 누구나 다들 아시는 삼국지라는 게임만 봐도, 위촉오 삼국의 영토크기를 보면 딱히 위나라가 매우 강하다는걸 인식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강남지방은 개발이전이라 오나라의 실제지배지역은 미미하고, 촉 역시 성도부근의 분지지방 말고는 딱히 좋은 생산력을 가진 땅들이 아니죠. 즉 당시 위가 가진 하북지방은 그 당시 중국의 전부였죠. 촉이나 오는 단지 방어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과, 장강의 방어적 이점을 가졌을 뿐이었죠.

조선시대가 침략만 당해서 우스워 보여도 가장 후대이기도 하지만, 통치적으로 가장 발전한 국가였습니다. 무조건 넓은 영토가 좋은게 아니라, 그 영토를 확실하게 통치하는게 발전된 국가죠.
               
꼬마러브 17-12-22 10:08
   
한사군은 그 통치방식을 논하기 전에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삼국시대는 고대가 아니라 중세시대입니다.
                    
칼리S 17-12-22 10:12
   
한반도내에 한사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떤 조직?이 국가?가 존재했나요?

그리고 삼국시대가 고대사가 아니라 중세사라는 건 님 혼자 생각이죠? ㅋㅋㅋ. 어떤 역사서도 삼국사를 중세사로 논하는 건 본적이 없네요.
                         
꼬마러브 17-12-22 10:14
   
낙랑국이 있었죠. 본래는 마한 땅이고요.

삼국시대를 중세시대로 보는 것은 북한사학계의 통설이며, 윤내현 교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역사를 고대 - 중세 등으로 나누는 개념 자체가 서양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역사서도 존재하지 않고요.
낙랑군의 통치방식이 토착민족에 의해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역사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해 두시길 바랍니다.
                         
칼리S 17-12-22 10:19
   
그냥 님이 역사서를 그냥 쓰세요.

기존 학설은 다 무시하고 뇌내망상으로 소설 쓰실거면 논쟁이 되나요?

최리의 낙랑국이 위만조선이 망하고 쭉 있었다고요? ㅋㅋㅋ. 마한땅이 한반도 북부까지면 사실상 한반도의 주인은 조선이 아니라 마한이군요 ㅋㅋㅋ
                         
꼬마러브 17-12-22 10:22
   
낙랑국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3 ~ 1세기로 추정됩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859&sca=&sfl=wr_subject&stx=%EB%82%99%EB%9E%91%EA%B5%AD&sop=and

그리고 마한은 단군조선의 거수국입니다. 이는 요동 내지 요서에 위치했던 기자국이나 위만조선도 마찬가지고요.
                         
칼리S 17-12-22 10:33
   
님이 주장하는 건 어떠한 사서에서도 언급된게 아닌 님 뇌내망상에서 짜깁기한 생각입니다. 이걸 상대방에게 제시하면 상대방이 인정하겠습니까?

낙랑국의 건국이나 마한이 조선의 거수국이라는 건 어떠한 사서에서도 정식 언급된게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우기면 논쟁 자체가 되겠습니까? 비웃음만 당하는 거죠.

이런 허무맹랑한 뇌내망상으로 다른 나라 역사학계와 논쟁이 되겠습니까? 동북공정, 임나일본부 저리가라인데요 ㅋㅋㅋ.
                         
꼬마러브 17-12-22 10:47
   
『제왕운기』<전조선기>

신라(- 시라尸羅)ㆍ고구려(- 고례 高禮)ㆍ남북 옥저(南北沃沮)ㆍ동북부여(東北扶餘)ㆍ예(穢)와 맥(貊) 모든 나라가 단군의 후예이다.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壽也


『삼국유사』<왕력>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제왕운기』한사군 및 열국기

「동명본기」에 이르기를「비류왕(沸流王)인 송양(松讓)이 말하기를『나는 신선의 후손으로 여러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지금 그대는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되니 우리의 속국이 됨이 옳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비류도 역시 단군의 후손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稱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 日淺, 爲我附庸, 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후한서』 <동이열전> 예

예는 붂족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였고, 동쪽으로 넓은 바다에 막혔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註 100, 本皆朝鮮之地也

그리고 위의 기록들과 더불어, 북만주~ 한반도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비록 나라가 다르더라도
영고, 동맹 무천, 5월제, 10월제 같은
동일한 성격의 종교의식과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야 하며

비파형동검과 같이 동일한 성격의 청동 유물이 만주 전역 ~ 한반도 남부로부터 공통적으로 출토된다는 점 역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동기 시대 당시에는 청동무기를 지배층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위에 제시한 사서 기록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겁니다.

- 또한 낙랑국에 관한 기록은 얼마 존재하지 않지만, 낙랑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널렸습니다. 『삼국사기』등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낙랑국은 삼국과 인접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고 단군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의 후예임을 자처했습니다.

위치는 지금의 평양입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858&sca=&sfl=wr_subject&stx=%EB%82%99%EB%9E%91%EA%B5%AD%EC%9D%98&sop=and
                         
뚜리뚜바 17-12-22 12:18
   
아니 여기 토론하는 태도 그지 같은 인간 왜이렇게 많냐;; 뭔 소설을 쓰나 역사서를 쓰나 먼 개소리냐는 식으로 지 잣대만 주구장창... 학계 논리가 이런데 반대고 상충되는 의견이 있으면 알려주고 가져갈거 가져가지 뭔 뒤에 ㅋㅋㅋㅋ << 급식충?
어이가 없네 뭔 니 혼자 소설을 쓰냐는니 기존 학설 무시한다는니, 당연히 나와 반대되는 입장이니 무시하는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그걸 안고 하는게 토론인 거지/ 뭔 소설같은 소리하고 않았네; 도덕책이나 좀 읽고 토론을 하던지. 적어도 쳐웃으면서 하는 토론이 토론인가 ㅡㅡ
                    
광명좌사자 17-12-22 19:36
   
삼국시대가 왜 중세입니까?? 이거 북한학계 학설 아닙니까?
중세시대로 단정짓는 이유는 뭐나요?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대라고 보는데
북한사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에 고대사회가 아니라는 말은 어이없네요.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고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북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댓글 다신 거보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는 걸 증명하는 내용은 없어요.
제가 보기에 유시민 작가가 꼬마러브님 성향의 분들에게 전하는 메세지 있는데 그거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신채호나 정인보 같은 민족 사학자 분들에게 많은 영향 받으신 거 같은데 그 분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절에 독립운동을 비롯해서 여러 활동을 하셨고 거기다 인프라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역사서를 집필하시고 그러셨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꼬마러브님께서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역사를 보라고 하셨지만 꼬마러브님 부터 과학적이지 않고 실증적이 않습니다.
 사서 외에도 평양 낙랑,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까지 유물 유적이 차고 넘치는데 우길걸 우기셔야죠.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던게 그렇게 민족역사에 치욕적입니까?? 이렇게 역사왜곡하고 정신승리 해봤자 남는 거 없어요. 일본애들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요?
                         
뚜리뚜바 17-12-22 20:43
   
뭐가 어이없다 건가요? 지금 토론 할 생각이 아예 없으신거 같은데?

북한사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에 어이가 없다? 뭐 또 종북 빨갱이 몰기입니까? 그거 아니라면 꼬마러브님이 뒤에 쓰신 윤내현교수도 얘기했다는건 왜 쏙 빼시나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 공인 사서 지리지에 명확히 기록된 기록에 어디 '한반도 북부'라고 명시되어 있습니까? 전부 지명으로 현재에 끼워 맞춘거 아니에요?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존재했다고 명시한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좀 하지마세요. 옛날부터 평양이었다고 우기실겁니까 현재의 한반도 평양에 낙랑군을 확정한건 기껏해야 100년밖에 안됬습니다. 그 논쟁이 조선 후기 200년동안 얘기가 오고 갔는데 뭐가 헛소리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겁니까? 지금 역사학계의 통설이라 그래서 그런겁니까? 그러면 서로 얘기를 해나가야지 말도 안된다는 식으로 나가니 항상 싸우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한서에 언급된 낙랑 위치로만 봐도 낙랑위치가 한반도가 아닌것은 쉽게 알수 있습니다. 무려 낙랑에 대한 언급이 8부분이며 동쪽으로 갈석을 지난다는 부분은 누가봐도 중국의 갈석의 동쪽이지 한반도 내로 비정할 이유가 대체 뭔지요? 설마 한반도 갈석을 얘기한다면 더더욱 평양이 아니지요 평양 동남에 위치해 있으니.
실증, 과학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한서는 낙랑군이 있을 당대 이고 공격자의 입장, 고려사, 조선사는 그후로 1000년이 지난 시점/ 대체 어느쪽이 과학적으로 더 신뢰성있는 내용을 말하는 거겠습니까; 전 과학,신뢰성을 말한다면 전자에 손들어야 하는게 맞다고 보는데요?
또한 님이 말한 3000기의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대방태수 무덤을 들었는데 발견된 대부분의 묘가 어린이의 무덤, 목곽묘는 이미 200년 낙랑군 이전대 부터 존재 여부 가능성, 중국식 벽돌 무덤이라는 것도 파보니 고조선계 유물이 상당수/ 님이 말씀하신 3000여기의 무덤들은 북한학자들이 밝힌것을 보면 다양한 연대에 각양각색의 이 나라 저나라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최근엔 낙랑지역으로 봤던 곳에서 3세기에 축조된 고구려 무덤까지 나왔는데, 이정도도 못우기면 뭘 주장해야하는 겁니까? 아직 북한과 통일되지 않고 발로가서 눈으로 보지 못한들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어찌 그리 확신을 할수 있는지요?
한반도에 한사군 있는게 치욕이냐고요? 정신승리냐고요? 이딴 소릴 하는게 역사 좀 안다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과학을 말한 사람이 어찌 이리 주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요. 만약 님이 말한 낙랑군의 내용들이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를 기점으로 반성하며 미래에 대한 처신을 다지면 될 일이지 그런 민족 치욕적이냐는 빈정되는 말로 과학적으로 증명도 덜된 것을 기정사실로 확정짓는 것은 정신 승리 아닙니까? 일본얘들이랑 다를게 뭐가 있나요?
                         
꼬마러브 17-12-22 21:13
   
<삼국시대는 중세시대다 >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5898&sca=&sfl=wr_subject&stx=%EC%82%BC%EA%B5%AD%EC%8B%9C%EB%8C%80%EB%8A%94&sop=and

제가 예전에 쓴 글입니다. 만약 이견이 있으시다면 근거를 가지고 반박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상대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면, 언제든지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비정했다고 하시는데... 그 기록을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언급하신 사서들은 모두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1000년 이상은 지난 기록들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낮다고 보여집니다.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말하는 1차사료 기록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사군이 요서에 있든, 요동에 있든, 한반도에 있든 거기에 정신승리를 하거나 치욕적이라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을 펼친 적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진실이 궁금할 뿐입니다. 사람 몰아가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잡설로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가 북한사학계보다 나은 점을 잘 못 찾겠습니다.
                         
꼬마러브 17-12-22 21:19
   
그리고 단재 신채호는 처음에는 민족주의자셨지만
후대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하신 인물입니다.

저 역시 아나키즘이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좋아하고요.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마치 제가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를 왜곡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는... 프레임을 씌우시는데, 저는 부정하고 싶군요.
                         
광명좌사자 17-12-22 21:35
   
ㄴ뚜리뚜바, 꼬마러브

무슨 내가 종북으로 몰았다는 겁니까?
북한학계에 통설이어서 어이없는게 아니라 중세시대로 단정지었기 때문에 답변한겁니다.글 좀 제대로 읽어보세요.  그리고 현재 한국사학계는 삼국시대를 고대로 보았고 이건 한국학계의 통설이면서 이미 교과서에도 나온내용입니다.
그리고 실증적 과학적으로 역사를 봐야한다고 꼬마러브님이 말하셨고 저는 그에 대한 답변만 했습니다. 또 그 주장이 맞고요. 그리고 저는 답변으로 사료 제시했으니 님도 주장하시려면 사료 가져와 보세요.
그리고 꼬마러브님 사료 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이
사료의 가치가 낮다고 하면 한국 역사서 어떤 것도 가치가 없어요.  어떻게든 구멍 만들어 보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의미없습니다. 그리고 꼬마러브님도 사료제시하세요. 그리고 어떠한 근거, 유물, 유적도 없이 단군릉 주장하는 북한 사학계??? 많이 신뢰하세요.
그리고 사료로 어디서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만든거나 신채호 정인보 선생 환단고기
이런거 가져오지마세요. ㅎㅎ 정약용과 한백겸도 사서의 의견이랑 큰 차이 없어요.
 저는 낙랑군이 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적을 통해서 지배층 무덤에서도 고조선토착민이 지배층을 형성했다는 걸 아니까요. 한반도 한사군이 있던게 그렇게 큰 치욕이여서 역사왜곡까지 하는게 맞는건지 이러면 일본이랑 다른게 뭔지 의문이 듭니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都邑)하였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이다. 경사(京師 :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

그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며 경사(장안)에서 5천리 밖에 있다.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而贏.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였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五部)의 병사가 모두 [왕을] 따랐다. 이때 온달(溫達)도 그 동안 기른 말을 가지고 따라갔다.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㑹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 隨行.

-『삼국사기(三國史記)』「온달열전(溫達列傳)」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4년(기원전 15) 가을 8월에 낙랑(樂浪)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秋八月, 遣使樂浪, 修好.
8년(기원전 11)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자를 보내 알리기를 “지난번에 서로 사절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겼더니, 지금 우리의 강토(疆土)를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해 들어오려는 생각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깨뜨리지 않으려거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뜯어내어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 번 싸워 승부를 가리자!”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회보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古今)의 상도(常道)이거늘, 어찌 감히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다 하겠는가? 전혀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강한 것만을 믿고 군사를 보낸다면, 우리 역시 그에 대응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화친을 잃었다.
秋七月, 築馬首城, 竪瓶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决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冝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強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與樂浪失和.

<고려사 / 志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북계 / 서경유수관 평양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 평안도 / 평양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도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위만(衛滿)이 패수를 건너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격파(擊破)하였다." 하였으며, 또 상고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 하였고, 또 수(隋) 양제(煬帝)의 동정 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
                         
꼬마러브 17-12-22 22:53
   
자꾸 그런식으로 사람을 비꼬아서 이야기하면 토론하기가 싫어집니다. 갑자기 환단고기는 왜 나오고 단군릉은 왜 나옵니까?

1.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都邑)하였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이다. 경사(京師 :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

- 평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음. 또한 주류 재야를 막론하고 평양의 위치가 한 곳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음. 대표적인 것이 동천왕 시절의 평양.
또한 『구당서』역시 한사군 폐지 이후에 만들어진 사서임. 1차사료가 아님

2. 그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며 경사(장안)에서 5천리 밖에 있다.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而贏.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

- 이 역시 마찬가지. 『신당서』는 1차사료가 아니며, 평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음.
 
3.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4년(기원전 15) 가을 8월에 낙랑(樂浪)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秋八月, 遣使樂浪, 修好.
8년(기원전 11)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자를 보내 알리기를 “지난번에 서로 사절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겼더니, 지금 우리의 강토(疆土)를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木柵)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해 들어오려는 생각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깨뜨리지 않으려거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뜯어내어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 번 싸워 승부를 가리자!”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회보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古今)의 상도(常道)이거늘, 어찌 감히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다 하겠는가? 전혀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강한 것만을 믿고 군사를 보낸다면, 우리 역시 그에 대응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화친을 잃었다.
秋七月, 築馬首城, 竪瓶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决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冝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強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與樂浪失和.

-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중국의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보아야 함. 왜냐하면, 만약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 깨뜨린 낙랑이 중국의 낙랑군이라면 당시 중국측 사서에 백제라는 이름이 등장해야 정상적이기 때문.

그러나 중국사서에서 '백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로부터 수백년 후인 근초고왕시기임.

쉽게 말해, 만약 중국의 낙랑군이 백제와 관계를 맺었다면, 낙랑군은 중국의 군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은 중국과 관계를 맺은 것이 됨. 예를 들어, 강원도의 홍천군이 외국과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당시 백제가 중국과 관계를 맺었다면, 중국 측 사서에 '백제'라는 이름이 등장해야 하는 게 정상임. 그러나 앞서 말했듯, '백제'라는 이름이 중국측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위의 기록 이후 수백년이 지난 후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

다시 말해, 당시 백제는 중국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

즉,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 깨뜨린 낙랑은 중국의 낙랑군이 아니라 별개의 낙랑국으로 보아야하며

기록의 '낙랑태수'는 '낙랑왕'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함.

4. <고려사 / 志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북계 / 서경유수관 평양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 평양의 위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고려사』는 1차 사료가 아님.

5. <세종실록 지리지 / 평안도 / 평양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도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위만(衛滿)이 패수를 건너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격파(擊破)하였다." 하였으며, 또 상고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 하였고, 또 수(隋) 양제(煬帝)의 동정 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

- 이 기록에 관해서 한 번 묻고 싶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기자조선을 수많이 언급함. 하지만 현 주류사학계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음.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기록만 긁어모으는 건 도대체 무엇?
                         
광명좌사자 17-12-22 23:00
   
ㄴ꼬마러브

님 반박하시려면 저처럼 사료를 제시하든가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셔야죠. 그렇게 님 혼자 뇌피셜로 끄적인거를 제가 뭘보고 확인하고 이해하라는 겁니까? 님처럼 사서들 뇌피셜로 그냥 부정하면 반박 끝인가요? 예를 들어 기자조선을 믿기에 세종실록지리지의 낙랑군에 대한 내용은 믿을 수 없다? 진짜 어이가 없네 계속 토론해봤자 답이 없을 거 같네요.
                         
꼬마러브 17-12-22 23:06
   
솔직히 말해서, 사서 기록의 거의 전부가 한사군이 요동 내지 요서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몇몇만 간추려 제시할게요.

삼국사기 동천왕조의 기록입니다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을 거쳐 물러갔다.

리고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는 보병과 기병 7,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백성들과 관리를 죽였다

삼국사기 태조왕기의 내용입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후한서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의 기록입니다.

西連諸國至于安息,東過碣石以玄菟、樂浪為郡,比卻匈奴萬里,更起營塞

서쪽으로는 여러 나라가 연이어져 안식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갈석산을 지나 현도와 낙랑으로써 군을 만들었으며, 북쪽은 흉노를 만 리 밖으로 쫓아내어 병영과 요새를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통전』이나『태강지리지』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죠?
                         
광명좌사자 17-12-22 23:18
   
ㄴ 꼬마러브
낙랑에 대해서 제대로 된 위치 특정은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근거죠???
뭐가 사료가 많습니까? 됐고요. 어거지 논리 그만 펴세요.
                         
꼬마러브 17-12-22 23:27
   
위치 특정이 실린 기록 드립니다.

『한서』에,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http://dogmas.tistory.com/entry/%ED%95%9C%EC%84%9C-%EC%A7%80%EB%A6%AC%EC%A7%80-%EC%9C%A0%EC%A3%BC-%EB%82%99%EB%9E%91%EA%B5%B0

『후한서』에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죠.

『후한서』 최인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신뢰성에 의문이 가신다면 후한서 원문 링크 드립니다.
https://zh.wikisource.org/wiki/%E5%BE%8C%E6%BC%A2%E6%9B%B8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낙랑군에는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고요.
                         
뚜리뚜바 17-12-22 23:38
   
알려줘도 이해를 못하면서 무슨 어거지라는겁니까. 이게 대체 왜 이런건지 묻는것도 아니고, 자기는 무슨 사료 제시하면서 일일이 이유를 다쓴것 처럼 말하시네.
꼬마러브님이 님 사료에 대해 아닌 이유를 밝혔듯 같이 이유 대면 될것을
그리고 신당서 구당서 5000리 당시 거리 가생이 검색창에 검색 해봐요 현재 평양과 거리가 맞는지. 안맞기 때문에 평양위치에 대해 말이 많은겁니다. 또한 꼬마러브님이 말한 관구검의 물러난 경로가 현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을 경우 물러난 경로가 말도 안되니 하는 소리에요.
                         
밥밥c 17-12-22 23:57
   
5. <세종실록 지리지 / 평안도 / 평양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하다못해 단군조선은 인정하기라도 하나요 ??????

 웬일로 단군조선을 나름 사서로 제시하기는 하네요.

 게다가 기자조선의 41대까지 제시하다니 , 기자조선 900년의 역사는 인정하시는지요.

 최소한 자신이 제시해 놓고 , 자신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죠 ???


 그런데 제시한 사서중에 섬서성 장안에서 5000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섬서성 장안에서 한반도 북부까지가 5000리 넘을것 같은데요 ;;;;;;

 섬서성 장안에서 하남성 낙양까지만 해도 이미 1000리입니다.
                         
광명좌사자 17-12-23 15:28
   
ㄴ뚜리뚜바
지금 서안에서 라오닝성 거리가 대략 1700km인데 서안에서 평양까지 무슨 5000리가 안됩니까? 님은 좀 빠지세요

ㄴ꼬마러브

한서 반박하겠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보시면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도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여기 유주에 예속 시켰다고 나와는 있는데 유주가 한사군 관할했다는게 한반도에 낙랑이 없었다는 근거입니까? 그게 근거였다면 세종실록지리지에 낙랑은 평양이다라는 말을 못쓰겠죠.

후한서 반박하겠습니다.
『“외(廆)가 낙랑군을 두어 통(統)으로 태수(太守)를 삼았다.”하였으니, 이것은 별도로 요계(遼界)에 두어, 옛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를 마치 후세의 요령(遙領)하는 예와 같이 한 것이지 한 나라 때의 옛 군은 아니다.』 안정복, 『동사강목』, 「사군고」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은 진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미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인하여 내지(內地)에 낙랑군을 두고는 옛 칭호를 모칭(冒稱)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모용씨의 낙랑군 및 조선현은 모두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척발씨(탁발씨, 拓跋氏 후위(後魏))에 이르러서는 또 요서나 북평(北平) 등지에 낙랑과 대방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 때의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일 뿐이다. 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진서, 『해동역사』, 「지리고4」

요동 지역에 낙랑군을 비정하는 기록들은 모두 모용씨 시기에 이치된 이후의 것들이며, 설사 한나라 때부터 있던 것이라 기록되었다 해도 그 기록이 틀린 것이라는 위 인용문으로 사실상 논쟁 자체가 종결됩니다. 님이 주장한 후한서 언제 작성돼었는지 확인하면 답나오죠.

그리고 요동에서 낙랑 유적 나온거 있나요?? 뻔히 한반도내에 낙랑유적 엄청나게 출토되었는데 이걸 우기십니까?
낙랑토성, 점제현 신사비, 영광 3년명 동종, 낙랑군 봉니,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주장하죠? 요동에서 낙랑군 유물 유적 나온거 있나요? 아니면 일제의 조작인가요? 무역 교류를 통해서 이게 들어왔나요? 이렇게나 많이?? 근데 왜 요동에는 없을까요?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 받는 것처럼 유물 유적이 모든걸 증명합니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나왔다 하더라도 옛 가야지역에는 일본 유적이 하나도 없으니 임나일본부설이 매장당한 거고요.
위대한 한반도에는 짱깨따위는 한발도 붙일 수 없겠죠. 암 그렇고 말고요~
                         
꼬마러브 17-12-23 15:44
   
1. 앞서 말씀드렸지만, 세종실록지리지를 포함한 『조선왕조실록』은 낙랑군 설치 이후 대략 1500년 이후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한사군 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사료적 가치는 낮습니다.

2. 이는 광명좌사자님께서 인용하신 『동사강목』과 『해동역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료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사군 문제를 논한다면 그 당시대의 1차 사료 기록이 뿌리가 되어야 하며, 나머지는 단지 참조로 쓰여야 함이 당연합니다.
『후한서』나 『한서』는 낙랑군 설치 당시의 1차 사료이고, 『조선왕조실록』이나 『동사강목』 등은 낙랑군 설치 후 대략 1500년이 지난 후의 기록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사료적 가치가 높은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3.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가 모용씨 시기에 이치되었다고 하시는데, 그 근거를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4. 한반도 내에 출토된 낙랑 유물 대부분이 광복 후 북한사학계에서 출토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는 이것을 낙랑군의 유물로 보지만... 정작 직접 발굴한 북한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낙랑국의 유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 일제강점기 시절 때 출토된 낙랑군 유물이 있으나, 이는 SBS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왔던 적이 있는 만큼,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5. 평양 지역의 중국계 유물이라는 것은 중국과의 무역 흔적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광무제 시기 이후에 평양 지역의 낙랑국에 대해서, 중국의 입김이 거세졌음은 저도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낙랑군은 아닙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900&sca=&sfl=wr_subject&stx=%EB%82%99%EB%9E%91%EA%B5%AD%EC%9D%98&sop=and )
- 그리고 제가 알기로 평양지역의 중국계 유물은 광무제 시기를 기점으로, 전에는 수량이 미미하다가 이후에 많아지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평양지역의 중국계 유물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 유물을 근거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하신다면, 사서 기록을 제시해주시면 됩니다. 즉, 고고유물에 입각해 문헌 고증을 뒷받침 해주셔야 합니다. 이게 ‘실증역사학’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리고 님 댓글에서 이런 내용이 있는데요.

설사 한나라 때부터 있던 것이라 기록되었다 해도 그 기록이 틀린 것이라는 위 인용문으로 사실상 논쟁 자체가 종결됩니다. - 댓글 중

- 인용문 하나로 고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역사학의 자세가 아니며 비과학적이고 실증적이지 않습니다.

6. 요동-요서 지역에 낙랑군 유물 발견됐습니다.
북경 지역의 한현도 무덤이 있고, 임둔 태수장 봉니가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압니다.

7. 저와 의견이 다르기에 기분이 나쁘실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증역사학'이란 감정이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 없이 문헌과 유물로써 엄밀한 고증을 요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저는 부딪치더라도 서로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유힉한 토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의 비아냥은 문제의 본질을 흐립니다.

8.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상대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나 저의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집 피우지 않습니다. 저는 위대한 한반도? 혹은 민족의 영광 같은 것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단지 진실을 알고자 할 따름이죠.
                         
꼬마러브 17-12-23 16:06
   
그리고 낙랑군 수성현에 만리장성이 시작한다는 기록에는 반박해 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제가 추가 사료를 제시하기 보다는 이것을 마저 반박해 주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사기>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통전-고구려전>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1)朝鮮縣 - 周封箕子地,...4)遂城縣- 秦築長成之所起

낙랑군, 한나라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2,3 생략 4) 수성현 -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만약 위의 기록들이, 평양에 위치한 낙랑군이 요서 지역으로 이치하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신다면, 윗 글에서도 말씀드렸듯... 낙랑군이 이치했다고 말하는 근거를 제시해주셔야 합니다.

참고로 만리장성의 기점인 갈석산의 위치는 하북성 창려현, 난하 하류 동부 유역(친황다오 일대) 이라는 것에 주류, 재야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습니다.

이병도처럼 황해도에 만리장성을 비정하고 싶다고 하시지는 않겠죠?
                         
꼬마러브 17-12-23 16:15
   
그리고 또 반박 안해주신 거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는 보병과 기병 7,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백성들과 관리를 죽였다

-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현 통설로 송화강 일대에 위치했던 부여가 어떻게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말이며

삼국사기 태조왕기의 내용입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 요동의 서쪽을 공격해서 대방군과 낙랑군을 노략질했다는 이 기록은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만약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실증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통설이라면, 이 정도 쯤은 쉽게 설명하실 수 있으시겠죠? 사서 기록을 포함한 '사료'로써 말이죠. '권위'를 이용하시지 마시고요. 저는 그런 거 혐오해요 ^-^
                         
광명좌사자 17-12-23 18:26
   
1,2
님이 뭔데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의 사료적 가치가 낮다고 판단합니까?  그리고 님이 주장하시는 거<한서>나 <후한서>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에요.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니네요.
注[一]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주석인 거 안보이십니까?
『후한서』 광무제 본기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이건 주신링크에 아예 없어요.
 ‘1차 사료’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자료는 한나라 존속 시기에서 수백 년 지난 당나라 때 사람 안사고나 이현 등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고.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슨 1차사료 얘기하시는데 후한서는 무슨 1차사료인 줄 아세요?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는 바로 서진 시기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입니다.

<삼국지> 고구려전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 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하고 있다.

<삼국지> 예전

예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 큰 바다(대해)에 닿는다.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후한서> 예전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과 접해 있다. 동쪽은 큰 바다(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옛 조선의 땅이다.

<삼국지> 한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해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후한서> 한전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주장대로라면 낙랑군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는 마한·진한·변한 등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어야 하는데요??

3.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為之置樂浪郡, 以統為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을 일컬음)와 서로 싸워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더니,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민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88

4. 5.
평양 낙랑토성, 점제현 신사비, 영광 3년명 동종, 낙랑군 봉니, 한나라의 오수전 동전, 3,000여기의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 황해북도 봉산군의 대방태수 무덤까지 유물 유적이 차고 넘치는데 우길걸 우기셔야죠. 아 무덤도 교역을 합니까? 성도 교역을 합니까? 비석도 교역합니까? 그냥 아주 소설을 쓰세요. 님이 이거 교역했다는 증거 대세요 저한테 자꾸 묻지마시고 그리고 역사학에서는 기록보다도 유물⋅유적을 더 중요시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 받는 것처럼 사서의 오류는 유물 유적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고조선의 강역을 비파형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임나일본부설이 금방 폐기된 이유가 한반도 남부에 유물, 유적이 하나도 안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서에 낙랑지역 평양이라 나와있고 그거에 맞게 유물, 유적들이 대량 출토 됬는데 뭘 더 증명하라고요. 그리고 EBS에 한번 나왔다고 갑자기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겁니까? 역사스페셜도 무수한 오류가 있는 채로 방송 내보내는 데 다 믿어야 하나요? 단군릉 조작하고 김정은 추앙하는 북한 사학계 님 많이 믿으세요. 그리고 제가 제시한 유물 유적 중 대부분 1945년 이전에 발견됐는데 뭔소리를 하세요 진짜 우길걸 우기세요. 소설을 쓰십시오.

6.
북위가 북연을 쳤다. 북연의 영구군,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현토군이 모두 항복하니 그곳의 3만여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위서, 세조기>
조선현 백성들을 평주 요서군 비여현으로 옮겨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였다.<위서 지형지>

한현도 무덤은 이걸로 반론되고요.

이게 가장 웃긴데 겨우 봉니 한두 개 나왔다고 지금까지의 지명 비정을 모두 갈아엎을 수는 없고 게다가 단순히 출토된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봉니라는 물건 자체가 문서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다 남아있을 수 있죠. 서울특별시 소인이 찍인 우편 봉투가 부산광역시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서울 = 부산이 될 수는 없는것과 같죠.

이제 님이랑 어거지 논쟁 하기 싫으니 평생 가생이에서 재야사학자 환빠들이랑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세요.
대신 여기서 나오지 평생 노세요. 다른 곳까서 역사 왜곡 일으키지 마시고요.
원래 쓰다가 이름 넣으라고 하면서 지워져서 안쓸려고 했는데 화나서 다시씁니다.
                         
광명좌사자 17-12-23 18:35
   
정사에다가 그걸 증명하는 유물 유적까지 다 말했는데 끝까지 어거지 사료타령 하지 마세요... 유물 유적부터 이게 낙랑군 유물 유적이 아니라 교역인지 증명하세요. 님 진짜 임나일본부 딱 그꼴이에요. 어떻게든 이겨서 정신승리 해보겠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 님은 유물 유적하나 제대로 증명못하는데 뭐가 토론이 됩니까 ?앞서 말했듯이 모든 사서에는 어느 정도 오류가 있고 그걸 보완하고 확증하는 것이 유물 유적입니다.
                         
꼬마러브 17-12-23 18:44
   
후한서 광무제본기 下에 있습니다.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https://zh.wikisource.org/wiki/%E5%BE%8C%E6%BC%A2%E6%9B%B8/%E5%8D%B71%E4%B8%8B

1. 저는 한반도 내에 낙랑이 없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평양 지역에 낙랑이 있었죠. 다만 그것은 중국의 낙랑군이 아니라 독립국가인 ‘낙랑국’이라는 겁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858&sca=&sfl=wr_subject&stx=%EB%82%99%EB%9E%91%EA%B5%AD%EC%9D%98&sop=and

2.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為之置樂浪郡, 以統為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을 일컬음)와 서로 싸워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더니,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민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88

- 이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이 이치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뭐하러 요동의 모용선비에게 귀부하겠습니까? 거리로만 따지면 모용선비가 있는 요서보다는 같은 漢족이 있는 산동 반도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가깝습니다.
또한 낙랑군의 백성 1000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했다고 말하는데, 1000여가면 한 가구당 5명이라고 쳤을 때 5000명입니다. 10명이라고 치면 10000명이고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장통은, 같은 漢족이 있고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운 서진으로 가지 않고, 저 멀리 배를 타고 요서로 간단 말입니까? 그것도 5000명 가량의 인구를 이끌고?
 애초에 가운데에 고구려가 있기 때문에, 평양 지역에서 요서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즉, 이 기록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입니다.
 낙랑군이 요서의 모용외에게 귀부한 이유는, 애초에 낙랑군이 모용외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사실관계 확인 부탁드립니다. 현재 주류사학계에서 낙랑군 유물이라고 하는 것 대부분이 광복 후 북한사학계에서 출토-발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비아냥은 문제의 본질을 흐립니다. 감정으로써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실증사학'의 자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무엇이 광명좌사자님을 그토록 광분케 하는 것인지 저는 정말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4. 광명좌사자님의 댓글 中

이게 가장 웃긴데 겨우 봉니 한두 개 나왔다고 지금까지의 지명 비정을 모두 갈아엎을 수는 없고...

- 그 지명비정의 근거를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꼬마러브 17-12-23 18:47
   
정사에다가 그걸 증명하는 유물 유적까지 다 말했는데 끝까지 어거지 사료타령하는 거 보니 진짜 님은 글렀네요. 유물 유적부터 이게 낙랑군 유물 유적이 아니라 교역인지 증명하세요. 님 진짜 임나일본부 딱 그꼴이에요. 어떻게든 이겨서 정신승리 해보겠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 님은 유물 유적하나 제대로 증명못하는데 뭐가 토론이 됩니까 상상의 나래로 그만 펴시고 잠이나 자세요. 앞서 말했듯이 모든 사서에는 어느 정도 오류가 있고 그걸 보완하고 확증하는 것이 유물 유적입니다.

------------------------------------------------

그렇습니다. 사서 기록이 근본이고, 유물 유적은 그것을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사서 기록이 우선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아직 이 기록들을 반박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는 보병과 기병 7,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백성들과 관리를 죽였다

삼국사기 태조왕기의 내용입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사기>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통전-고구려전>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1)朝鮮縣 - 周封箕子地,...4)遂城縣- 秦築長成之所起

낙랑군, 한나라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2,3 생략 4) 수성현 -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정 싫으시다면 다른 사서 기록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광명좌사자 17-12-23 19:03
   
1. 아~ 님이 군에서 국으로 바꾸면 낙랑국이 되구나 훌륭합니다.

2. 뇌피셜 대단하시구요.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본토와 연결고리 끊겼는데 왜 꼭 산둥반도로 가야하나요? 배타고? 이미 산둥반도랑 요동 전부 선비족 일파들이 장악하는데 그게 그거죠.

3. 사실관계 확인할 것도 없고 그냥 네이버에 처보세요 백과사전에 제가 말한 거 대부분 45년 이전에 발굴됩니다.

4.
논점이 먼지 모르시죠?? 임둔 태수장 봉니가 요서에 나왔다고 임둔이 요서라고 우기는게 웃긴겁니다. 갑자기 뭔 지명비정 헛소리하고 앉아있는지 제가 증명하라고 한거나 증명하세요.
                         
광명좌사자 17-12-23 19:07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저도 정사기록 쭉 읊었고 님도 정사기록 쭉 읊었죠. 님 기록보면 요동 나온것도 있고, 제가 쓴 기록보면 평양 나옵니다. 그 상태면 논란에 여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결국 유물, 유적 나왔죠. 그런데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하십니까? 말귀 못알아들으시네. 어떻게든 함 이겨보려고 참 뭐 받아들일 자세가 되있어? 언어도단이죠. 1차사료 얘기할 때 그냥 지나갔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에효...
                         
꼬마러브 17-12-23 19:11
   
1.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낙랑국', '낙랑왕' 이라고 분명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지』와 『삼국사기』를 교차검증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말씀드려도 광명좌사자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 같아 보류하겠습니다.

2. 종주국인 전한이 망하고, 이후 중원에 들어선 4개 왕조가
본국과 연결고리가 끊겨 있고
본토와 바다 건너 떨어져있는 평양 일대를
수백년 동안 지배했다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더욱 뇌피셜 같습니다.

만약 정말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진작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주변 토착세력에게 점령당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3. 낙랑 고분 3000기가 북한사학계에서 발굴한 것 아시나요? 제가 문과라서 수학을 잘한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님이 말씀하신 유물 합친 게 3000 보다는 작다는 사실은 압니다. ^-^

4. 무엇을 저에게 증명하라고 요구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꼬마러브 17-12-23 19:15
   
음, 팔이 안으로 굽혀진다고는 하지만요. 제가 최대한 중립적-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저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씀드렸는데, 광명좌사자님은 무엇 때문인지 계속해서 흥분하면서 인신공격을 하시는데요.

"왜 자꾸 헛소리 남발하십니까? 말귀 못알아들으시네. 님 정신승리 하려고 버티는거 진짜 지겨워요. 어떻게든 함 이겨보려고 참 뭐 받아들일 자세가 되있어?"

라는 말과 더 어울리시는 분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 아 그리고 '되'가 아니라 '돼' 입니다. 맞춤법 정정 부탁드립니다.

+추가)

"저도 정사기록 쭉 읊었고 님도 정사기록 쭉 읊었죠. 님 기록보면 요동 나온것도 있고, 제가 쓴 기록보면 평양 나옵니다. 논란에 여지 있을 수 있죠."

- 많이 발전하셨습니다. 낙랑군을 평양에 비정하는 것이, 반박의 여지가 없는 확고부동한 통설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셨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에

논란에 여지가 있을 수 있죠 ->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죠

로 수정 부탁 드립니다.
                         
광명좌사자 17-12-23 20:04
   
1. 대부분 사서는 군이라고 적혀있네요.

2.  낙랑군 망할때 전한은 옛날에 망했고 논의부분은 후한 부분입니다. 후한 망하고 진 망하고 북중국을 5호가 휩쓸었습니다.
만약 정말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진작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주변 토착세력에게 점령당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그래서 313년에 고구려한테 망했잖아요?


3. 점제현 신사비, 동종, 오수전, 반량전, 귀틀무덤 등등 많이 쏟아집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6775&cid=46620&categoryId=4662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7837&cid=43065&categoryId=4306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536&cid=40942&categoryId=3337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362&cid=43065&categoryId=43065

4. '꼬마러브"님께서 낙랑의 유물 유적들이 교역에 증거라고 하셨으니 그러면 해당 증거를 대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를들어 점제현 신사비를 한나라에서 배달해줘서 님이 좋아하는 낙랑국에서 고마워서 그 비석을 세워놨다 이렇게라도 사료로 말이죠.

맞춤법은 빨리쓰다보니 많이 틀렸네요.

후한서 자료는 대부분 주석이고 1차사료라고 하기에도 힘듭니다.
                         
광명좌사자 17-12-23 20:38
   
계속 평행성만 달리기에 끝도 없을 거 같네요. 일단 괜히와서 신경 거슬리게 한 거 죄송하고 인신공격이라고 느끼게 한 부분 죄송합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십시오.
               
도배시러 17-12-22 13:45
   
한사군의 문제에서 걸리는게 왕검성(후대 동천왕의 평양성) 아닌가요 ?

왕검성의 위치는 어디인지 말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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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0 [한국사]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정설이 아닌 적… (21) 타이치맨 12-23 948
14699 [한국사] 진짜 여기는 과대망상 소굴이라 그래서 안들어왔었… (7) 여의도야왕 12-23 902
14698 [한국사] 최근에 고려 전쟁 기록 보면 침공루트를 살펴보는 편… (9) Marauder 12-23 1080
14697 [통일] 만약 1990년대에 통일이 되었다면? (2) 고구려제국 12-23 1533
14696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8) ㅡ 요 주/현의 교치상 (1) 감방친구 12-23 2077
14695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7) ㅡ 암연현의 동계신라(東… (25) 감방친구 12-23 3055
14694 [한국사] 신라금관과 일제식민사관 (2) 냥냥뇽뇽 12-22 1063
14693 [기타] 주류사학의 코미디 (9) 관심병자 12-22 1393
14692 [기타] 조선상고사 - 삼조선 총론 (2) 관심병자 12-22 1422
14691 [한국사] 한사군은 아직도 결론이 안 났나요???? (6) 남해 12-22 854
14690 [한국사] 한사군은 중국이 통치하던 지역이 아닙니다.... (12) 타이치맨 12-22 1236
14689 [한국사] 고구려는 낙랑군과 313년까지 함께 평양에서 살았다 ? (39) 도배시러 12-22 1632
14688 [기타]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4) 관심병자 12-21 1205
14687 [북한] [질문] 북한의 친일청산은 얼마나 잘 됐나요? (14) 끄와악ㄱ 12-21 1576
14686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6) ㅡ 압록강의 위치 (7) 감방친구 12-21 2392
14685 [중국] 위서지리지와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의 수수께끼 (28) 도배시러 12-20 1945
14684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5) ㅡ 압자수와 혼동강 (3) 감방친구 12-2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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