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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5-03 02:15
[기타] 우리나라 역사가 BC233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글쓴이 : nyamnyam
조회 : 3,000  

왜 BC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된 기록이 있고 그 이후 한참동안 아무런 기록도 없다가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이 잠깐 나오고 그 이후 망할 때 까지 기록이 없나 의문입니다.
물론 이게 최근에 와서 왜곡한 역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시대기록에도 고조선이 언급되니 말이죠.
뭐 모든 역사를 유물과 기록을 가지고 따질 수야 없겠지만 고조선의 건국시기와 고조선 자체에 대해서 너무 기록이 적은게 아닌가 싶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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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짱 15-05-03 03:04
   
조선시대기록이 4000년전의 역사를 증명할만한 가치는 없고
삼국유사의 3000년전 역사에 대한 기록도 중요하지 않긴 마찬가지죠.
     
꼬마러브 15-05-03 03:14
   
사실 삼국유사는 위서의 기록을 인용한것임으로 3000전이 아니라 2000년전이죠..
바람노래방 15-05-03 08:26
   
맞습니다.
(고)조선의 기록은 너무 적죠! (고)조선뿐 아니라 그 시절의 전세계 고대사 대부분이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사는 근거가 있건 없건 기록이 나오면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근데 (고)조선은 기록은 적지만 유물은 꽤 많이 나옵니다.
제 판단에 (고)조선만큼 오래된 역사중 이렇게 유물이 많은 역사는 이집트를 제외하면 없다고 생각됩니다.

연대별, 지역별, 일관성 있는 유물이 출토되기에 기록이 없다고 부정해버리면 유물 증거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죠.
요동 15-05-03 08:26
   
임진왜란, 강점기... 수많은 기록들이 소멸되었죠
굿잡스 15-05-03 10:39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왕이 태학 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옛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다섯 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11년조

이 기록을 보면 고구려 초기에 100권에 달하는 상당한 기록유산인 유기(留記)가 편찬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초기에 이정도 분량의 기록을 편찬했다는 건 다름 아닌 고구려 선대 즉 고조선 시대 관련

기록일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이야 왕 옆에 사관이 동석해서 그때 그때 기록하고 당대에 편찬하든 세계사

에서도 드문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고 보통은 당대가 아닌 후대에 편찬하는 경우가 일반적. 삼국사기

역시 이런 중세 고려시대에 와서 이런 앞선 일부 문헌과 서토사서들을 조합해서 편찬했고 고려사

는 조선 초기 발해사같은 경우도 조선 후기에 본격 편찬되어 나온.)

그리고 이 시기를 잠시 살펴보면 영양태왕은 서토 통일왕조인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을 본격화

하면서 대규모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앞선 9년(598)에 고구려는 말갈기병 1만을 동원해서 수나라를

선제 공격을 해버립니다. 이를 통해 수나라의 전진 보급기지를 무력화 시키고 이런 동북아의 긴장속에 초기

고구려의 선대 기록을 모은 유기를 압축해서 신집(新集)를 편찬했던 시대상황으로 봤을때 자국내에 일종의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고취시켜 고구려의 기상과 정신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했던 의도가 아닌가 함.

(고구려는 일찍히 귀족 교육기관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서민 즉 일반 백성을 위한 문무겸비의 경당 제도

역시 이런 우리 고구려인의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통해 국력 결집과 성장의 기반으로 삼았던 나라)


하여튼 이런 일련의 기록을 보면 이후 천년사직 고구려가 패망하면서 상당한 자료 역시 분실,소각되

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고구려 선대 기록 역시 상당히 유실되었지 않나 싶군요. 여기에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사서들은 특히나 자신의 치세를 높이고 고구려를 의도적으로 낮추기 위해 춘추필법

이 매우 도드라진 시기였고 서토사서의 특징 자체가 자신의 유리한 점은 좀더 구체화 부각시키고 자신의

약점은 상당히 협소,간략화, 혹은 누락하는 식이였기에 오늘날 고조선 관련 기록은

청나라 시절 여러 사서를 모아 편찬한 사고전서나 이를 바탕으로 우리 관련 기록을 모아 편찬한

조선 후기 해동역사 및 춘추전국시절의 여러 서토 기록에도 보이지만 기본 고조선의 대한 간략한 명칭이나

위치등에 그치고 있고 한무제시기의 사마천의 사기는 청동에서 철기로 넘어가면서 보편화되고 더욱 강력해

진 철기로 인해 청동기시절의 소수 청동을 독점하면서 지배력을 누렸던 고조선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분화된 열국시대 중 하나였던 서쪽 변경의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
굿잡스 15-05-03 11:06
   
고조선 전기 비파형 동검(기원전 7,8세기부터 성행, 점차 좁아지는 후기형 세형동검으로 대처되는 전기까

지 사용.최근은 2,3백년 더 앞서 나오는 것으로 보는)의 분포

http://lab-1000.tistory.com/14

보통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서토의 청동검과는 확연히 외모에서부터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마치 비파형

악기와 같다해서 비파형 동검에 손잡이를 교체할 수 있는 분리형 및 주성분도 구리,주석,납등의 성분이

일정한 비율로 상당히 정교한 앞선 합금비율로 서토형처럼 손잡이와 일체형에 단순 청동과는 질적 외형적

으로 다름. 여기에 청동투구나 청동 단추형 갑옷등도 동북아에서 가장 앞선 금속형 갑옷등이 출토

되고 있는 상황.

고조선 화려한 복식(갑옷)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981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C%A1%B0%EC%84%A0+%ED%99%94%EB%A0%A4%ED%95%9C+%EB%B3%B5%EC%8B%9D&sop=and


삼좌점 고구려 치의 원형 석성으로 보이는 방어형 성곽.(사진)

http://daily.hankooki.com/lpage/culture/201410/dh20141025100423138640.htm

이 유적은 고조선 건국 시기인 기원전 2천년경의 하가점 하층시기에 세운 방어형 석성으로 보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기자의 기를 나타내는 표시가 나와서 중기 기자조선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는.

기본적으로 저는 주무왕이 기자를 봉해서 기자 조선을 세웠니 어쩌고의 서토식 상투적

기술방식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초기 상서대전에서 주무왕의 폭군질에 간언하다 감옥에 간 기자가 이후 석방되어 조선으로 갔던 내용이

후대에 가서 점차 확대 해석되어 마치 조선에 가서 왕처럼 그것도

고조선문명권인 동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 상나라가 서토 하한족을

정벌하고 500여년간 지배할때 제후에 불과했던 주가 이후 기자를 고조선 왕에 봉해서 세웠

니 어쩌고 이런 식은 별로 신뢰할 만한게 못되는 각색질의 연속. 단지 기자라는 인물이 존재

했던건 부인할 수 없고 또한 당시 이미 고조선 역시 존재했다는 점이죠. 이때문에 사고전서

등에서는 고조선도 시대별 세분화해서 단군부터 중기 기자 후기 위만시대로 나누고 있고 서

토인들은 자신들의 접점이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 구분화해서 간략히 기록에 넣은 것

으로 이해하는게 합당.


그리고 만주 요서일대에는 상,주시대의 청동예기등이 나오는데 이건 이 지역으로

동이족 상나라가 멸망하면서 일부가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한편으로 요하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세력이 난하 넘어 이 일대를 털면서 빼앗아 온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는.
굿잡스 15-05-03 11:22
   
요약하자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고구려가 초기에 편찬한 선대 고조선시대의 사서가 상당히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시대를 거듭하면서 이런 기록 유실이나 소각이 거듭되어 오늘에 이르다 보니 근세시대에도

고조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국가적 제례를 지냈다는 기록 및 (이미 고조선 제례는

삼국시대부터 제사 지냄) 이 관련 국호도 조선으로 명칭했지만 기본적으로 고조선 전기는 문헌학적

부분보다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그 실체 규명이 좀더 접근하기가 정확하고 빠른 상황이겠죠.


문제는 쭝궈 정부가 이런 만주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국제적으로 개방해서 공동조사발굴을

통해 학문적 접근하에 한다면 지금도 놀라고 산재한 유적 발굴 상황에서 동북아 역사를 다시 쓸

공인된 상당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지 않을까 함.
꼬마러브 15-05-03 11:23
   
삼국유사에 써져있는 단군신화는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의 책이 아닌 중국의 위서를 인용해서 쓴것인데..
북한학자인 김병룡은 위서의 저자가 자기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건국과 관련한 사실을 제멋대로 꾸며낼 이유가 없고 꾸며낼 수도 없었을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역사책이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입수한 자료에 기초하여 쓴 것이 명백하다고 했습니다..
위서는 3세기경에 편찬된 책으로 알려져있는데.. 3세기경에는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입니다. 고구려 수도까지 점령해서 대규모로 약탈을 했는데.. 아마 이 약탈물 중에서 고구려의 역사책이였던 유기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중국의 위서의 기록이 고구려의 유기에 나오는 기록을 인용했을 수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23세기경에 고조선이 세워졌다는 것은 고구려초 고구려인의 인식이 되므로 사료적 가치가 상당히 높아지겠죠.. 그리고 이런 기록들은 고고학적 유물과도 일치하니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봉시 지주산 청동기 유적은 방사성탄소측정 결과 서기전 25세기경으로 나왔고.. 특히 한반도에서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물들은 서기전 2400년경으로 나옵니다.. 이를 토대로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25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볼 때 그후 약 200년 후 고조선이 세워졌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보나 문헌적으로 보나 합리적입니다.
굿잡스 15-05-03 11:26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국내 최초 고조선 문헌 발견


복 교수가 발굴한 문헌은 '고려사'에도 '단군편'이 별도로 있다는 것과 강화도 참성단 축조 시점이 당초 알려진 고려 후기가 아닌 고려시대 이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작성한 '승정원일기' 영조44년 5월 22일자 기록에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긴 임금 원종도 참성단에 올라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거나 훗날 권근이 황제를 대신해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복 교수는 밝혔다.

그는 강화도 참성단 축조 시점이 고려시대 이전이란 사실도 찾아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참성단 축조 시점이 고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고 난 고려 후기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 교수는 그러나 "이는 고려사의 기록만을 참고로 했기 때문"이라며 "고려말 권근이 우(禹)황제나 또는 창(昌)황제 때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낸 제문을 살펴보면 실제 축조된 시기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와 백제에서도 1년에 두 번씩 단군“�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이 기록은 그동안 백제와 신라가 고조선의 후예였나 하는 의구심을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134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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