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몽골에 굴복했지만 부마국 지위를 받고 몽골 황족에 일원이 되었고 심양왕에도 봉해지고 등등
우리가 얻은게 더 많다는 식으로 자위하는 얘기들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똑같은 기준으로 일제시대를 보면 어떨까?
조선왕실은 나라가 망했지만 그대로 이왕가로써 일본 왕족 대접을 받으며 왕실이 유지됐고 일본 황족의 딸을 며느리 삼아 천황가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으로부터 내지 일본 다음 가는 대접을 받았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봐야 하나?
조선총독은 대만총독이나 만주총독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였으며 일본제국내에서 조선인의
지위는 일본인 다음이었고 그 다음이 대만인,몽골인,만주인,중국인,기타 동남아인 순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름 대접받은거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부마국?
말이 좋아 부마국이지 고려에 시집온 몽골 공주는 공식적으로 그 지위가 국왕보다 더 위에 있었다.
공주(원나라 황제가 아닌 친왕의 딸이라 해도)가 상석에 앉고 고려왕은 그 밑에 앉아야 했다.
심지어 투기가 심했던 제국대장공주는 남편인 충렬왕을 때리기도 했고 충렬왕은 이런 공주가 무서워
도망다니기까지 했다.
고려왕은 머리를 빡빡 깍고 몽골식 이름을 공식적으로 썼으며 몽골왕족이 입는 옷을 입고 몽골어를 썼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기 전엔 몽골에 반인질 상태로 살아야 했고 국왕이 되서도 수시로 몽골 조정에 입조해야
했다.
몽골지배기 외에 아무리 사대했다고 해도 명나라니 청나라니 그 이전 신라와 당 사이에
국왕이 진짜 입조한 례가 없다.
말 그대로 진짜 몽골에 제후국 식민지였던거 뿐이다.
공민왕을 보자.
공민이란 시호는 그 사후에 추증받은거고 살아있을때 공식적인 이름은 바엔티무르다.
이 공민왕이 기씨 일족을 멸하면서 반원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정말 웃기는 얘기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몽골로 물러나기 전까지 공민왕은 단 한번도 반원개혁을 한적이 없다.
기철 형제를 쳐죽인건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와 자기가 끔찍히도 아끼고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가
원수사이였기 때문에 아내를 위해 일종의 원수 갚음을 한거 뿐이지 무슨 반원개혁을 위해 기씨들과 싸운게 아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 위왕 베이르티무르는 원래 황제순위에 나름 순위권이었는데 기황후(당시엔 황후가 아닌 일개 후궁이었음) 일파에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귀양갔다가 나중에 쓸쓸히 죽는다.
시집와서 자기 친정이 풍지박살 난 꼴이고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공민왕 역시 기씨 일족이 곱게
보일리 없었던 거다.
그래서 기철 형제를 숙청한거다.
기황후는 여기에 또 빡돌아 공민왕을 쫒아내고 심양왕 독타불화(역시 고려 왕족이나 몽골식 이름)
를 고려왕으로 교체하려 했으나 이미 중원을 여러 군벌들에게 뺏겨 힘빠진 몽골에서 심양왕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고작 만여명의 병사로 어케 해보려 했으나 최영 장군에게 간단히 제압 당하고 만다.
이때 그 유명한 문익점이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심양왕 편에 붙어 먹는 사건이 나고 나중에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온 공로로 사면되지만 심양왕 편에 붙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나중에 심양왕에 반대해
원나라에 의해 강남에 유배됐었다는 구라로 덮여지지만 아무튼 그렇단 얘기.
심양왕의 군대를 물리친 후에도 한동안은 원나라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원나라가 명나라의 북벌에 의해 북경을 버리고 몽골초원으로 다시 물러나자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몽골색채를 지우고 명나라를 섬기기 시작한거다.
원나라를 치려하니 제주도에서 말을 바치라고 주원장이 요구하자 바로 따랐고 관복도 명나라식으로
이때부터 바꾼거다.
일제 식민지 36년 한세대의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의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그 해독이 얼마나 심했나?
몽골지배 기간은 무려 100년 가까이 된다.
3세대 가까이 되는거다.
그 해독이 얼마나 심했고 그 원나라에 붙어 먹으며 같은 민족을 짋밣은 이른바 친원파들은 행태는
또 오죽했겠는가.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비하할 필요도 없겠지만 쓸데없이 미화 할 필요도 없다.
부마국?
고려에 따로 보낼 친왕도 없고 하니 그냥 고려왕을 몽골친왕으로 몽골사람 만든거에 지나지 않는다.